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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 < 유효원 협회장 >

  • 5월 8일
  • 4분 분량

유효원 협회장(1914-1970) 은 참부모님을 따라 산 세월이 20년이 채 안되는 짧은 생이었으나, 섭리의 발전사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위대한 사적을 남긴 통일교회사의 큰 인물이다. 천부의 뛰어난 지성으로 원리 말씀을 듣는 순간에 그 깊은 뜻을 깨우치고 영감어린 진리체계-<원리원본>을 학문적 언어로 정리하여 통일원리 해설서와 <원리강론>을 집필하였다.


<원리강론>은 메시야 참부님의 계시서 <원리원본>을 기초로 성약시대의 하나님의 진리를 신학적 논리로 해설한 새시대, 새말씀의 교본이다. 통일교는 <원리>라는 진리를 중심으로 신앙의 새차원을 열었다. 기존의 ‘믿음으로 만이’라는 소생기 유아적 신앙을 넘어, ‘아는 만큰 믿는다’는 바른 자세로, 참된 종교- ‘신령과 진리’를 중심한 높은 차원의 신앙세계를 개척한 것이다.


이 새진리-‘원리’의 집필자도 유효원이었고, 이 ‘원리’의 제1강사도 유효원이었다. 불편한 몸으로 매일 10시간 이상을 강의하는 전설의 주인공이었고, 10년간 강의하는 동안 1급 원리강사, ‘명강사’를 수없이 길러냈다. 유효원은 초대 협회장으로 청파동 시대의 출발과 그 노정의 복잡다단한 섭리적 사정을 책임적으로 관리하고 감당한 지도자였다. 그는 청파동의 전설이었고 청파동 시대의 중심 인물이었다.


나심과 성장

유효원 선생은 1914년, 참부모님과 같은 고향 땅인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출생하였다. 조부 유상찬이 개신교로 개종한 이후 유정한 이신신 부모님 역시 교회개척과 학교 설립등에 정성을 다하는등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차남이다. 탄생전 모친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여질 생명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는데, 새벽녘 마지막 어둠을 비추던 큰 별이 품에 들어와 안기는 꿈을 꾸었다”.

어린시절 총기가 남달라 ‘수재’라는 소문이 인근에 자자했다.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증조부 유상돈 등 가문 어른들의 영향으로 애국심도 강했다. 1927년 영창보통학교, 1933년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6년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수료하고 의학부에 입학하여 ‘수재’임을 증명했다. 그러나 학업에 정진하던 중 결핵균이 뼈에 침투하여 고관절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게 되어 1939년 학업을 중단하는 불행을 겪게 된다. 26세에 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불구의 몸이 되었다. 고향 집에서 6년 동안 병마와 씨름하며 생의 유한성에 절망하고 동시에 생과 사를 주관하는 ‘신적 존재’에 대한 관심도 깊어갔다.

겨우 심신을 수습하여, 1945년 해방후 동생들을 데리고 남하하는 도중에 연평도에서 연복중학교를 개교하여 가르치기도 했다. 무상으로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던 중 한국동란이 발발하여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통일교 입교

1953년 사업을 구상하던 중 평소 알고 지내던 양윤신을 통해 ‘원리’말씀을 처음 듣게 되었다. 그리고 김성실, 김원필 등을 통해 말씀을 더 공부한 후, 참아버님이 계신 곳을 찾아갔으나 첫 대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 24일 아버님을 모시고 있던 이수경을 통해 참아버님이 직접 기록한 ‘원리원본’을 빌려 읽고, “‘원리원본’을 읽은 뒤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이 책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다”고 고백하였다. 인생에 고민도 많았기에 감동도 컸다. “미미한 불구의 몸이오나 버린 양으로 거두시와 뜻 이룸에 도움 되고자 합니다. 부르심에 응하여 이 한 몸 바칠 영광의 날이 있기를 바라나이다”라고 아버님께 편지를 올렸다.


참아버님은 이 편지를 읽으시고 “스승을 만나보지 않고도 전도가 된 사람이다”고 기뻐하시며 직접 부산으로 오셨다. 마침내 역사정 상봉이 이루어졌다. 12월 24일부터 사촌 누인인 유신희 집에서 참아버님에게 직접 말씀을 듣기 시작하여, ‘원리’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해 1월 초에 동생 유효민과 김명희등을 불러 말씀을 듣게 하고 함께 입교하였다. 참부모님을 모시는 사도적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결심하고 ‘뜻 길’에 들어선 것이다


‘원리’ 말씀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한 선생은 바로 말씀의 능력을 보여주는 원리강사가 되었다. 아버님에 대한 절대 믿음, 절대 복종의 자세로 신앙의 본을 보였다. 참부모님도 “명령만 하면 死地로 갈 수 있는 사나이”라고 그 충심을 인정하셨다.


선생은 1954년 협회창립에서부터 초대 협회장으로 명을 받고 교회의 제반 행정을 담당하여 초창기 교회의 기반을 튼튼히 만들어 나갔다. 1955년 7월 4일 아버님의 무고한 옥살이가 시작될 때, 참아버님을 따라 스스로 서대문 형무소로 찾아가‘7.4수난’에 동참하여 그의 믿음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천부의 학문적 자질을 발휘하여 ‘논리적으로 잘 정리한 새진리’- <원리원본>에 기초한 ‘원리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선생이 원고 초안을 쓰면, 여러 사람들이 읽고 그 내용을 토론하여 수정하고 다시 참아버님이 검토하는 순서로 집필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참아버님의 직접 지도와 인도를 받아 1954년부터 3년동안 ’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원리책 <원리해설>이 1957년 8월15일 출판되었다. 식구들이 비로서 원리 교과서를 가지고 언제 어디서나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새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 협회는 <원리해설>을 신학적으로 해설한 <원리강론>을 1966년 5월1일 출판했다. 집필을 주도한 사람은 물론 선생이었다. 원고를 집필하는 공간을 별도로 마련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협회장은 새로운 식구들을 가르치는 한편, 원리강론 집필을 완성해 나갔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하루 종일 18시간 이상 원리강의를 하기도 했다. 절대신앙, 절대사랑, 절대복종의 자세로 책임을 감당하는 사도중의 사도요, 제자중의 제자였다.


말씀을 들은 새 식구들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심정이 부활하여 전도를 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2일 주말 원리 수련을 받은 식구들이 전국으로 나가 ’개척전도‘의 시대가 열렸다. 심정이 뜨거운 열심 시대였다. 원리 강의를 하며 원리를 배우는 시대였다. 협회장의 지도를 받은 원리 명강사들이 탄생하였다. 식구들이 통일원리 선포회, 부흥회를 통해 전국 각지에 교회를 세웠다.

축복’

선생은 1960년 4월 16일 인류를 대표하는 ‘3가정’으로 역사적 ‘축복’을 받았다. 축복 받은 부인은 1955년 이화여대생으로 ’이단교회‘에 나간다고 퇴학처분을 받은 학생 사길자씨다. 이로서 통일교 축복역사 시대가 시작 된 것이다. 이후 통일교 발전 역사는 축복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61년 36가정 축복을 시작으로 1992년 3만쌍 축복까지 통일교 역사는 곧 축복역사가 된다.


축복가정이 되었지만 개인의 가정 생활보다 공인으로서의 삶으로 더욱 바쁘기만 했다. 교회 행정은 물론 축복결혼의 식전 준비 책임, ’축복‘에 대한 교육까지 진행하는 부지런한 세월이었다. <원리강론>원고 집필도 계속했다. 문자 그대로 청파동 시대의 중심인물이다.


1969년 오래 계속되어온 고관절의 진통이 심해시작했다. 결국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여 고관절을 복원하는 수술을 두 번 받았다. 그 과정에서 생가지 못한 간암을 발견되었다. 고관절 수술을 회복복 기회도 없이 간암의 진행이 빨랐다. 완치를 위한 백방의 노력도 소용없었다. 세계의 식구들의 기도와 눈물 속에 갑작스런 유고처럼 성화하셨다.

그가 부모님을 모시고 보낸 헌신의 17년은 바로 통일교의 초창기 역사 그 자체와 같다. 1970년 7월 24일 57세의 일기로 떠나실 때,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세 아들이 있었다.


참부모님은 “세례 요한은 예수님 보다 6개월 나이가 많았고, 유효원은 나보다 6살 많았다”고 하면서 “유효원은 세례 요한적 입장에 있었다”고 협회장에 대한 애뜻한 심정을 표현하셨다.


유효원 선생의 섭리적 위상은 1. 통일교 초대 협회장 1954-1970 2. 1954년부터 1970년 초창기 통일교의 산 증인, 산 역사 3. 통일교 교리서 <원리강론> 집필하여 교회의 이론적 기반을 완성한 인물로 요약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

선생은 이론의 여지 없는 청파동 시대의 주인공이다. 유효원 협회장이 청파동을 떠나는 순간 섭리의 소생기-청파동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다.


참부모님은 장성기 섭리를 위해 1971년 미국으로 출발하였다. 섭리의 세계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참부모님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섭리를 승리하시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실 때는 한남동 시대였다. 한남동 공관은 1985년 천일국 시대의 섭리를 주관하시는 본부 공관으로 준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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