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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 3인의 선교사

  • 5월 23일
  • 6분 분량

   


  

  통일교 선교사의 ‘창세기’시절에 등장하는 삼인의 인물이 있다. 최봉춘, 김영운, 김상철 선교사 세분이 그들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정되고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원리>의 설명에 의하면, 부름을 받는 섭리사의 인물들은 다섯가지 조건에 부합되는 사람들이다. 먼저 선민 가운데 태어나야 하고, 선의 공적이 많은 선조의 후손으로 나고, 뜻을 이루는데 필요한 천품을 타고나야 하고, 그중에도 후천적 조건이 구비된 자를 머저 부르시고, 하늘이 필요한 시기와 장소에 맞추어진 사람들이다.

  ( <원리강론> 제6장 예정론 제3절 인간에 대한 예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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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봉춘 선교사

  섭리역사에는 하늘이 소명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최봉춘 선교사는 성야섭리 시대의 해외 선교를 위해 하늘이 준비하시고 소명한 인물이었다.

    

   최봉춘 선교사는 부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그곳에서 초•중등교육을 마치고 8·15 해방 직전에 귀국하였다.


  부친이 독실한 천리교 신자였다. 하늘의 계시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교주처럼 일체 외부인과 접촉을 않으면서 친척과도 인연을 끊고 살기 때문에 자연히 젊은 최봉춘은 부친을 몹시 원망했고, 종교라면 지긋지긋하게 생각했다.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을 만나면 예수 믿는 것을 그만두라고 권할 정도로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이나고, 나라는 어렵고, 백성들의 생활은 세계 183째로 가난한 형편이었다. 이런 저런 일에 종사하며, 생활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이웃 아주머니를 따라 산상기도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뒷자리에서 멀뚱거리며 앉아 있는데, “여기 악한 사람이 와 있는가, 은혜가 내릴 때가 되었는데, 안내린다! ”고 부흥사가 야단치는 소리를 듣고, 자기에게 하는 소린줄 알고 놀라 ‘아버지, 하나님’을 불렀다. 그리고 스스로 놀랄만큼 큰 소리로 연속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을 불렀다. 영적 역사가 벌어진 것이다.


  그렇게 극적 경험을 통해 교회를 나가게 되었지만 의문되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러다 초창기 식구 송도빈(宋道彬)장로를 만나게 되고, <원리> 강의에 많은 감명을 받고 통일교에 입교했다. 그때가 1956년 4월 10일이다. (협회원번호361).


  일본에서 나고 자라 일본어와 일본 문화에 익숙한 준비된 일본 선교사가 나타난 것이다. 참아버님께서는 1년반 교회개척의 헌신 생활을 통해 신앙 훈련을 시키신 후, 1958년 6월 충남 계룡산 갑사(甲寺)에서 선교를 위해 특별 기도를 해주셨다. 일본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최봉춘은 “부름 받아 나선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힘차게 성가를 부르며 하산하였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원수지간으로 외교관계도 단절되고, 래왕이 끊긴 상황이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일본을 갈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불법 밀항선을 타고 밀입국 하는 것 뿐이었다.


  부산에서 기회를 보다 밀항선을 탔다. 요행으로 밀항선에 올라 3일을 굶고 6월 17일 밤 일본 고쿠라항(小食港)에 입항하였으나 곧바로 체포되어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6개월 형을 받고 형무소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자유로 석방 되어도 한국으로 송환될 것이 뻔하니, 밤낮으로 어떻게 도망을 칠 것인가만 생각했다. 탈출만이 사는 길이다. 극단적이지만 계시적인 생각이 떠 올랐다. 병원에 가면 탈출이 용이할 것이라 생각되어, 식당에 있는 간장 한병을 한번에 다 들이 마시고 실신했다.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는 동안 탈출을 결행했다. 추적을 피하여 멀리 가야 했다. 기차를 타고 모든 면에서 익숙한 동경을 향했다. 이틀 걸려 신주쿠역에 도착했다. 1953년 동경을 떠난지 7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YMCA에서 신세를 지기도 하고, 옛날 친구를 여기 저기 찾아가 몇일씩 묵기도 하고, 교회에 가서 ‘새말씀’을 전하기도 했다. 신분이 불분명한 사람으로 나타나니 귀담아 듣는 사람이 없었다. 물빵으로 배를 채우며, 기회가 있는 대로 전도를 하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 <원리>를 번역하는 생활을 했다.


  남은 돈이 다 떨어질 지경이 되어, 회사를 경영하는 친구를 찾아가 전도를 열심히 했으나 믿지를 않았다. 몸도 많이 쇠약해져, 신세 한탄이 저절로 나오는 지경이었다. 할 수 없이 형편이 괜찮지만 찾아가기 싫었던 친구의 집을 찾아가 신세를 지며, 말씀을 전했다. 뜻밖에도 그 친구가 관심을 갖고 말씀을 잘 들었다. 다시 전도의 희망을 느끼고, 인연이 있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말씀을 전했다.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된 것은 일본으로 귀화한 한국인 크리스찬 시미즈(淸水)씨를 만나면서부터다. 그는 웅계사(雄鷄舍)라는 시계포를 경영하고 있었다. 오전에는 시미즈씨의 가게 일을 돕고 하오에는 웅계사(雄鷄舍) 2층에서 원리 강의를 하게 됐다.


  드리어 1959년 12월 2일 하오 7시 15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동경교회라는 이름으로 첫 예배를 보게 됐다. 전단지도 만들어 일본 땅에 처음으로 이름을 드러냈다. 일본 통일교회 역사의 제1보를 내디딘 것이다. 이날 신학생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모일 예정이었지만, 나를 비롯해서 시미즈씨, 스다(煩田)씨, 다무라(田村)씨 4명뿐이었다.


  이어 한국 부인 조정도(曺正道)씨를 만나게 됐다. 이분은 뿌리 깊은 기독신자로서 그 신앙이 매우 독실했다. 원리를 듣고 그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완벽한 교리라는 데 놀라워했고, 중심 식구가 되었다. 식구들이 늘어나 30여명이 예배를 보니 교회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자 사탄의 역사가 벌어져, 몇 번의 고비을 넘어야 했다. ‘불법 이민자 아래서 교회 발전이 불가능하다’며 배신하고 떨어져나가는 지도자가 생겼다. ‘도망 다니는 사람을 중심으로 하다가는 결국 망하고 만다. 우리 일본 사람들이 단체를 만들어서 새출발 하자’고 나간 것이다. 한국의 선생님 따를 필요 없이 자기들끼리 하면 더 발전하고 좋지 않으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유교나 불교도 중국 사람 불러서 그 사람을 중심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겨우 남아진 몇 명의 식구들을 격려하여 다시 출발해야 했다.


  유명한 교수 식구가 열심히 활동을 하다, 자기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이놈의 조센징, 건방지다. 만일 경찰에 이르면 잡혀가는 줄 몰라?” 하면서 모욕을 주며 나가는 일도 생겼다.


   고물 장사를 해서 힘겹게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데, 믿을 수가 없는 일이 벌어졌다. 지방 교회에서 고생하면 전도하는 식구가 100만 엔을 보내온 것이다.


  나고야 교회에 노방 전도를 하고 있는 17세와 19세의 어린 식구의 강의를 듣고 한 부인이 허름한 전도소를 찾에 왔다. 말씀에 감동된 부인이 ‘연꽃이 더러운 연못에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은 이런 곳에서 나는구나’ 감탄했다.


  그리고 여러 부인들을 전도하여 동경에서 교회를 짓는데 보태라고 하면서 엄천난 큰 돈을 헌금한 것이다. 시련을 이기고 승리하는 사명자를 하늘은 결코 버리지 않는다. 준비된 더 많은 사람을 통해 축복의 역사를 진행하신다.


  그 후 일본 황족 계통에 있는 한 분이 나오게 되자 그와 연관된 사람들과 거물급들이 들어오고, 교회가 나날이 번창하였다. 국가적 차원의 섭리를 위한 출발의 기대가 세워졌다.


  어느 날 동경에서 한 청년이 우리의 노방전도 강의를 듣고 감동을 받아 더 자세히 듣고자 교회를 찾아왔다. 그분은 200만 신도를 갖고 있는 불교단체 입정교성회(立正佼成会)의 청년부장이었다.


  말씀에 감동을 받은 이 청년의 안내로 입정교성회 회장을 만나게 되었다. 회장님은 하루 종일 이야길 해도 그냥 들어 주는 분이었다. 그리고 놀라운 말을 했다. 회장님은 비서실장과 아들, 그리고 청년부의 책임자를 보낼 테니 훈련시켜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수상이나 국회의원까지도 회원인데, 두 아들만은 종교를 믿으려 하지 않아 걱정이라면서 아들을 교육을 시켜 한을 풀어 달라는 것이었다.


  회장님의 두 아들이 말씀을 들으며, 노방 전도도 함께 나가고, 쓰레기도 주워 팔며, 교육과 훈련을 잘 받았다. 40일이 지난 후에는 새로운 모습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이 원리 말씀이 아니면 세계를 구원할 수 없다는 내용을 비서실장과 아들이 회장에게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두 아들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회장은 너무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회장의 적극 지지로 200만 신도중 중심 간부들의 교육을 시작했다. 그래서 청년들 가운데 대학 졸업자, 건강한 자, 인물 잘난 사람 100명을 뽑아 달라고 해서 교육을 시키게 됐다. 이 청년들이 세계 청년들을 움직여 보자고 회장에게 제의해서 “세계 청년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에 대한 교육은 40일을 4등분 해서 10일씩 지날 때마다 자기 야외에서 수련회를 실시했다. 마지막 10일에는 자유를 주고, 동시에 금식을 시켰다. 모두 원리로 무장되어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살겠다고 맹세하는 청년 지도자 거듭났다. 수료식을 하면서 “여러분들은 하루속히 원리 말씀을 중심 삼고 우주복귀를 완수하라”라고 눈물로써 당부했다.


  그렇게 되자 불교 내의 전통적인 고수파들이 반발하며 사탄의 반대역사가 일어났다. 입정교성회의 2백만을 다 뜻 앞으로 인도하지는 못했지만, 중심 간부 청년들은 대부분 입교하게 되었다. 일본교회의 튼튼한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40명, 50명 되던 식구가 우수한 청년들을 중심으로 4, 5백명의 열성 회원들이 활동을 하니, 일본 정부가 주목하는 교회로 성장한 것이다.


   어떤 지도자는 일본 내의 자유화 물결로 인해 득세한 공산주의, 창가학회 문제에 골치를 앓고 있는 차제에, ‘최고 지도 이념을 갖고 있고, 세계주의 이념을 부르짖는 통일교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격려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사가 와서 나의 고향이 어딘가를 묻는 것이었다. 우리를 반대하는 세력을 등에 업고, 경찰은 1964년 6월 2일 최봉춘을 연행하였다. 6월 4일 입국 관리국으로 넘어가 44일의 옥고를 치르게 됐다. 이 기간 중 많은 식구들이 정성 어린 면회를 와서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과 의아심을 금치 못하게 했다.


 이때 우리를 지지하는 일본 재계의 거물인 사사가와 료이치(笹川良一)이 큰 역할을 하였다. 사사가와 회장은 일본 선박회사 총연합회 회장으로, 권세가 당당한 사람이다.


  이 분이 당시 법무 위원장에게 가서 “나는 이미 나이 먹어 일본에 공을 못 세우지만 이 청년은 일본에 와서 청년운동을 하고 일본을 위해 큰일을 하는데 이 청년을 석방해 달라”라고 청원했다.


  법무 위원장은 “지금 이 청년이 사회에 문제가 되고 있어서 나 혼자 힘으로 힘이 드니 이 청년이 석방된 후 한국에 나갔다 들어오면 영주권을 주겠다”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래서 만 7년 만인 1964년 9월 1일 귀국하게 되었다.


  1965년 1월 28일에 참부모님께서 친히 일본을 방문하셔서 성지택정, 식구 교육 등 유사 이래 볼 수 없었던 하늘의 큰 축복을 내리셨다. 일본 교회의 새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최봉춘 선교사는 선생님의 명령에 의해, 3월 16일 천로역정의 일본 선교를 마무리 짓고, 미국 선교의 노정에 오르게 된다. 참부모님의 제1차 세계 순회 노정에 동행하는 은사를 받으며 새 출발을 다짐하게 된다.


  통일교 선교사의 큰 인물 최봉춘의 사적은 역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물의 섭리적 대서사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우리 후대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교훈이다.


1) 하늘은 때에 맞추어 준비된 자를 부르신다.

2) 섭리는 사탄의 반대역사, 시련을 극복하며 발전한는 사실이다.

3) 시련을 통해 탕감을 하고 하늘의 축복을 받는다. 하늘은 준비된 자들을 보내 돕는다

4) 사탄의 반대역사로 우리는 시련을 당하고 탕감을 치르지만, 하늘은 동시에 우리의 본심을 회복시키시고 영적 성장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게 하신다.

5)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 헌신의 자세가 성공의 열쇠다.

6)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 지상천국의 큰 뜻-을 중심한 큰 이상을 간직하고 일을 해야 큰 인물들을 전도할 수 있다.

  큰 뜻을 가져야 큰 인물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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