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誠愛士 양윤영 선생 >>
- 4월 10일
- 4분 분량

재림의 때다. 한반도에 성령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한국의 1920년대, 30, 40, 50년대는 성령의 시대요, 동시에 계시의 시대였다. 새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신령한 사람들, 예언하는 사람, 영통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고, ‘이제 곧 주님이 오시니, 회개하라’ 외치는 부흥회도 많았다. 임박한 섭리의 때를 알리는 사건이 1954년-55년에 발생한다. ‘이단 통일교’를 다니는 학생들을 제적하고 교수들을 제명하는 사건이 터지고, 연일 언론의 일면을 장식했다. 아버님이 7월4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되면서 수난의 역사가 벌어졌다. 그 와중에 하늘이 준비한 섭리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요한, 최원복, 유효원, 정석천, , ,,, 양윤영, 김영운, 박봉애, 박보희, 김영휘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주님을 만나 섭리의 주역으로 나서게 된다.
그 중에서도 양윤영 선생의 사적이 눈에 띄는 이유는 50년대 통일교 수난 시대의 단초를 제공한 계시적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유효원 협회장으로부터 <원리>강의를 듣고 입교(1954년 4월5일)한 양윤영 이화여대 교수는 다음 날부터 바로 전도를 시작했다.
주님을 만나고 새진리를 알고나니 어떤 두려움도 주저함도 없었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제 어디서나 지극한 심정으로 전도를 했다. 한경직 목사, 김양선 목사등 당시 한국 교회의 큰 인물들을 찾아가 새말씀을 전했다. 이승만 대통령을 전도해야 하나님의 뜻이 빨리 이루어질 것이라는 영감을 받고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절친인 박마리아 이화여대 부총장 집을 찾아갔다.
그 불타는 심정의 절박한 모습을, 양윤영 선생의 자서전에서 볼 수 있어, 여기에 그대로 소개한다.
< 그 다음날 새벽에 나는 학창시절 나의 스승이기도 했던 박마리아 씨 댁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이른 새벽이라 잠옷 바람으로 나온 그는 몹시 놀라며, ‘아니, 네가 이 새벽에 무슨 일로 나를 찾아 왔느냐’ 하면서 안으로 들어가지고 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흥분된 어조로, ‘ 선생님, 저는 새 진리를 찾았습니다. ,,, 선생님도 저와 함께 가서 꼭 한번 들어보지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내가 하는 말과 표정을 이상하게 여기고, 내 권유를 뿌리쳤다. ,,, 그러나 나는 같은 학교에서 일하던 때라, 그분이 귀찮아 할 정도로 자주 찾아가, 내가 받은 하늘의 계시 내용과 원리말씀에 대해 진지하게 말씀드리곤 했다. 이 대통령의 사명이 매우 크다는 꿈도 꾸고,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다. ,,,,,, 하루는 박마리아 씨에게 ‘ 선생님은 자식이 물에 빠져 죽을 지경이 됐다면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겁니까? 새 진리를 믿는 저를 미친 사람으로 보신다면, 선생님께서는 새 진리를 직접 알라보신 뒤 잘못된 것이라면 저를 건져 주시는 것이 도리아닙니까?’하고 따졌다. 그러자 박마리아 씨는 ‘그럼 한번 가보자’고 했다.
결과는 예상하던 기대와는 너무도 달랐다. 북학동의 세대문 집에 까지 가서 유효원 협회장의 강의를 반시간정도 들은 박마리아 씨는 거절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 誠愛師 양윤영 선생 추모집: <<뜻을 위해 살고 뜻을 위해 또 죽으리>> 2021년 천원사 출간. 142-143쪽)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권력자들, 유력한 지도자들은 뜻을 거절했으나 선생의 뜻 대한 열심은 이화여대의 동료 교수, 학생들 심정을 불러이르켜, 전도의 바람이 불었다. 학생처장 최원복 교수, 기숙사 사감 한충화 교수, 신임 받는 신학자 김영운 교수들이 입교하고 학생들 사이에도 <원리 말씀>은 계속 퍼져나갔다. 이화여대, 연세대학의 학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존경 받는 교수들과 수많은 학생들이 ‘이단’으로 비난 받는 신흥종교로 몰려가자 미국 교단의 지원을 받고 있던 학교당국은 국가권력까지 동원하여 조직적으로 박해를 시작했다. 결국 1955년의 이대사건이 벌어지고 아버님이 수감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50년대 초창기 예배볼 집 하나 없어 이집저집, 이골목 저골목으로 몰리고 쫏기던 시절, 양윤영 선생은 당신의 집을 완전히 뜻 앞에 내 놓았다. 장충동 저택은 식구들의 안식처였고, 가장 좋은 강의 실이었다. 유효원 협회장은 밤 낮 없이 원리 말씀으로 식구들을 교육하여 초창기 청년 지도자들을 길러냈다. 예수님의 사정에 통하는 아버님의 눈물의 기도와 열정적 말씀은 새로 전도된 식구들에게 바로 이곳이 하나님이 역사하는 자리임을 느끼게 했다.
양윤영 선생은 또한 하늘이 보내주신 천부적 음악인이었다. 50년대 출발 섭리를 위해 준비된 인물이였다. 선생은 식구들의 감사와 감격, 기쁨을 천상의 아름다운 하늘 곡조로 표현하여 성가 13장 <맹세>등 성가 7곡을 작사 작곡했다. “성가집”이 만들어 지고 식구들의 심정문화 예술세계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초창기 식구들은 이 천상의 선율에 취해 “성가”를 부르고 또 불렀다. 찬양 속에, 감동의 눈물 속에 식구들의 심정은 성화되고 신앙은 성장해 갔다. 고생도 핍박도 주를 만난 기쁨으로 묻혀버리던 시절, 양윤영 선생은 얼굴은 언제나 화사하고 빛이 났다. 교회를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동산의 노래’ 소리를 듣고 입교하기도 했다.
선생의 대서사적 생애 드라마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 이제 막 1막을 마친 격이다. 1959년 협회 제1차 수련회가 열리고 나라복귀의 대명을 받은 식구들이 전국에 개척 전도를 나섰다. 부모님은 수난의 시대를 마감하며 ‘역사적 성혼’으로 섭리의 새시대을 열었다. 식구40일 수련이 계속되고 총동원령이 내렸다. 동시에 36가정을 시작으로 축복역사도 시작되었다. 이들 축복가정들은 30년대 이후 출생한 사람들이라 1910년 생인 선생의 자녀 뻘이 된다. 이들을 인도하는 참부모님을 모시는 일은 몸이 열이라도 손이 모자랐다. 교회 재정은 턱도 없이 부족하고 할 일은 태산같이 많았다.
선생은 온전한 헌신을 위해 아직도 어린 당신의 아들과 딸을 헌신의 제단에 바치기로 결심한다. 고아원에 보내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하늘만이 기억하는 그때의 사정과 심정을 자서전의 글로 소개하며 선생의 열전을 마치기로 한다.
<< 하늘이 요구하는 책임은 무겁고 큰데, 자녀가 넷씩이나 되니, 먹이고 입히는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나는 며칠 동안 자녀들 문제를 놓고 많은 생각을 했고, 하늘 앞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마음으로 담판 기도를 했다. 그 때 하늘의 계시도 내가 결심한 대로 자녀를 떼어 놓더라도 뜻길을 따라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전 인류를 대표해서 사랑하는 제 자식을 버리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는 응답을 받고 나서, 참아버님께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내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너는 다른 사람이 못하는 생각을 했구나”하셔서, 됐다고 결심했다.
네 자녀를 모두 안방에 불러 앉히고 앞으로 나와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입장을 설명하려니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
너희들을 고아원에 보내기로 했다’는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미8군 사령부에 근무하는 한상길 소령이 미군트럭을 가져왔다. 나는 우선 아이들을 안심시키기려고 미국에 가기위해 미군 부대에서 데리러 왔다고 얘기했다.
나는 아이들 넷이 모두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봤다. 그 때 나는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 반면 하늘에 대한 더욱 강렬한 충성의 마음이 생겼다. 이 두 마음이 뒤범벅되어 그날은 아이들 앞 길에 하늘의 은사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나 자신이 변함없이 뜻 앞에 충성하고 하늘의 섭리에 도움이 되는 인물이 될 것을 다짐하는 기도를 하며 하루를 보냈다. 어미 된 마음에 그날 밤 자식 생각하느라고 잠을 이룰 수 없었지만, 뜻 길을 가는 사람은 가장 사랑하는 것을 아낌없이 하늘에 바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밤을 지새웠다.
넷을 모두 보냈으나 큰아들 두삼이는 나이가 15세가 넘어 고아원에서 받아주지 않아 일주일 만에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어린 것 셋만 남겨놓고 큰 아들마저 돌아왔으니 내 마음은 더욱더 아팠다. 그러나 나에게는 자식들 돌보는 일보다 더 큰 하늘의 사명이 있었기에 그 아픔을 참고 또 참아야 했다. 그랬기에 일선에서 맹활약할 수 있었다. ,,, 내 기억으로는 큰아들(이두삼 강남교회 장로)이 나와 같이 살면서 한 번도 내 말을 거역한 적이 없었다. 내 말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며 살았다. 둘째 두림이는 고아원에서 5년 가량 있었고, 두영이는 10년, 막내 영란이는 8년을 있다 돌아 왔다.>>
( 상기 <<추모집>> 184-187쪽 )
선생의 4분의 자녀들이 겪은 고난과 우여곡절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이야기다. 하나님의 보우하사 모두 축복을 받고 이제는 3세, 4세를 이어 섭리의 길을 가고 있다.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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