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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순 선생의 사적

1시간 전
9분 분량

  

  1950년대는 하나님 6천년 구원섭리사의 종결시대요, 천일국 창건의 시작년대다. 선악이 교차하는 역사적 격동의 시대요, 변혁의 시대이기도하다.


  가장 극적인 기록은 남북 분단과 1950년 6,25 전쟁, 그리고 이산가족의 역사일 것이다. 이 시대에 한민족은 전쟁의 고통과 그 처절한 현장을 경험하고 목격했다. 그 비극적 현실을 온 몸으로 감당하며, 살아 낸 사람들 가운데 1천만 이산가족이 있다. 대부분의 이산가족들은 분단의 장기화로 헤어진 가족을 다시는 보지 못하고 한많은 지상의 생을 마감했다.


  이 민족적 고난은 동시에 섭리적 새 시대를 여는 산고이기도 했다.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는 극한의 절망속에서 오로지 하늘대한 신앙으로 고난을 이겨낸 사람들이 있다. 50년대 초창기에 참부모님의 뜻 앞에 부름을 받아 승리한 식구들이 그들이다.


  최정순 선생의 이야기는 이 시대 민족적 고난과 고통, 절망과 희망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대표적 사적이다. 아래는 선생의 <고희기념문집>을 토대로 정리한 글이다.


  일제 강점기, 함경도 원산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1914년), 누씨 여학교와 이화 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원산에서 교편 생활을 하던 중 남편(문종구, 원산 수산전문학교 교수)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살 때 6.25 전쟁이 발발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박해하고 지식인, 지주라고 끊임없이 경계하니 고향을 떠나야 했고 언제 다시 돌아간다는 기약도 없이 부모님과 헤어졌다. 피난의 와중에서 남편마저 잡혀간 채, 원산 앞 작은 섬에서 애기를 낳았다. 고향을 잃고, 남편을 잃고, 통한의 고개를 넘고 넘으며, ‘더 이상 큰 슬픔과 고통은 있을 수 없는 삶’이었다. 올망졸망한 5남매를 이끌고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를 거쳐 이리저리 헤맨 끝에 여학교 교사 자리를 얻어 강원도 원주에 정착했다.


  1952년 겨우 정신을 차릴만할 때 아홉 살 아들이 갑자기 병사했다. 선생은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아홉 살 아들은 아이답지 않게 생각이 깊고 마음이 너그럽던 아이였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자기보다 다른 가족을 먼저 생각하고 양보하던 착한 아이였다. 피난 시절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고생만 시켰는데, 치료 한번 해주지 못하고 떠나보내니 내 가슴에 한이 맺혀 있다.


  먹고 사는 일이 그 무렵 얼마나 잔인하게 느껴지던지,,, 교직원들이 보내 준 조의금으로 당장 쌀을 사서 밥을 지어 먹었으니, 슬프고 괴롭다는 감정조차 마음껏 소유할 처지가 못되었다. 불쌍하게 가버린 아들을 내 손으로 묻어주지도 못하고, 사람을 사서 묻으라,하고는 그날로 출근하여 교단에 설 수 밖에 없었다.


  그 동안 눈 앞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생명을 보았다. 생명의 가치가 땅 밑에서 구르는 현장을 넘어왔기 때문일까, 남편과 아들을 잃고도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음은 결코 마음이 모질어서가 아니다. 이미 떠나간 사람들은 두 번 다시 생각 안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오히려 내 마음이 이미 너무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현실은 보지 않고 오로지 신앙생활로서 잃어버린 희망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나의 현실이라는 것은 이미 상처투성일 뿐이다. 잃어버린 것은 남편과 자식만이 아니었다. 고향과 부모님을 잃는 동시에 정신적인 지주마저 무너진 느낌이었다. 누구와 더불어 무엇을 어찌 이룬단 말인가. 생활의 궁핍을 면하는 것만이 급선무는 아니었다. 방황하고 고뇌하는 영혼에 새로운 힘이 필요했다. 나의 남은 삶이 이 땅 위에서 굳건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라도 나는 마지막 희망인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움은 본향으로>> 103쪽


  지상의 삶에 대한 희망을 접은 선생에게 하늘은 새로운 생의 봄을 준비해 주셨다. 1955년 봄, 선생은 원주여고의 제자들을 데리고 인솔자가 되어 이화여대의 입학시험 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화여자 전문학교 시절의 절친 최원복 교수가 있었다. 어렴풋이 소식은 듣고 있었지만 만날 기회가 없었던 친구다. 참으로 감격적 재회였다. 두 사람은 얼싸안고 재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 만남은 하늘을 만나는 길의 시작이기도 했다. 최원복 선생은 바로 한 달 전, ‘새로운 말씀’을 듣고 감격하여, 새로운 인생길-섭리의 길을 출발했던 것이다.


  1955년 3월 1일, 바로 그날, 학생 인솔 책임을 동료 선생에게 맡기고, 최원복 선생의 인도로 ‘세대문 집’으로 가 하루 종일 유효원 협회장의 원리 강의와 참아버님의 ‘새로운 진리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두 친구는 이제 ‘천정’으로 하나 된 영원한 자매가 되었다.

     

    “,,,. 처음 듣는 기도와 찬송이 얼마나 은혜로웠는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13일째 금식을 한다는 노인의 모습에서 초췌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피부에서는 광택이 더 나고, 힘찬 찬송 소리는 마치 천사들의 노래처럼 들리니 이 곳이 바로 에덴동산이로구나 생각하면서 흐뭇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말씀에 취해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것 같았다. 30여년간의 믿음이 잘못되었으니 그동안 헛살았다는 자각이 앞섰다. 엄청난 비애와 절망 속에서 현세를 외면하고 오로지 사후의 천국만을 동경하며 성서대로 살아 보려고 몸부림치던 나의 신앙은 이제 180도로 전환되었다. 밤에 잠을 좀 자 보려고 누웠으나, 놀라운 사실에 충격을 받았음인지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성서를 통하여 얼마나 사모하고 만나고 싶었던 분이었던가. 그 분을 지금 직접 만나 모시고 말씀을 들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현실인가 생각하니 꿈만 같고 이것이 생시냐 꿈이냐 살을 꼬집어도 보고 무엇에 홀린 것도 같은 흥분 속에서 몇 시간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웠다.


 이틀 동안에 내 인생관을 새로이 바꿔놓은 혁명의 집을 떠나면서 밖에 나와 하늘을 보고 땅을 보니 ‘새하늘, 새땅’으로 총천연색 영화를 보는것 같이 찬란했다. 청량리에서 원주까지 성서 마태복음을 읽기 시작하니 이때까지 관념적이었던 하나님의 실존이 생생히 느껴졌다.


 원주로 돌아오면서 선생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상의 삶에 희망을 접고 하늘에서 만나기만을 소원하던 주님을 지상에서 만났다는 흥분은 컸다. 기차를 타고 원주로 향하는 선생은 ‘내가 몸밖에 있는지, 몸안에 있느지 모르는’ 그 감격을 실감했다. 천지가 바뀐 것이다. 하늘이 내려오고 지상의 삶이 천국이 된 것이다.


 지긋지긋하게 고통스러웠던 피난 생활과 철저한 신앙으로 인간 생활의 모든 즐거움을 경원했던 나로서는 언제나 명랑한 표정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근육이 굳어져 있었는데, 말씀을 듣고 난 후, 나 개인과 민족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는 이 놀라운 사실을 나 홀로 먼저 알고 있으니 얼마나 기뻤는지 난생처음 느껴보는 심정이어서 즐거운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모든 직원들이 밝은 나의 표정을 보고, ‘최선생, 무슨 좋은 일이 생겼느냐’고 물어왔다”.

                  <고희기념 문집>50쪽


  원주로 내려와 교편생활을 계속하는 것은, 오로지 이웃과 학생들에게 ‘새로운 진리’를 가르치기 위한 단 하나의 목적 때문이었다. 열심히 말씀을 전했고, 모두가 감명을 받고, 선생을 따랐다. 원래 존경받는 선생님이었고 교인이었기에, 학생들과 동료 선생들, 원주 감리교회의 많은 신도들이 ‘새 말씀’을 경청했다.


  신실한 교인들이 은혜를 받고 젊은 청년 학생들이 새 말씀에 감동되어 선생의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자 원주시의 기독교계가 술렁였다.


  그리고 1955년 6월, 이대 사건이 터졌다. 학생들이 제적을 당하고 교수들이 면직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어 선생님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며 언론이 시끄러웠다. 선생이 원주에서 말씀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한 지 1년이 겨우 된 때였다. 교단의 오해, 반대, 핍박의 역사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학교의 동료 교사들과 학생들도 겁을 먹고 주저하기 시작했다.


  천만 다행으로 열다섯살 짜리 큰 딸을 비롯하여 식구들이 엄마의 편을 들고, 심정에 불이 붙은 젊은 학생들이 불굴의 자세로 하나되어 나오니, 힘이 났다. 어찌하였든 성령충만, 은혜충만의 시대였다.


  핍박이 심할수록 영계의 역사도 뜨거웠다. 식구들이 모이면 방언이 터지고, 불을 받고, 내일 벌어질 일을 예언하고, 서울에서 아버님이 설교하는 ‘말씀의 제목’을 알아 맞추기도 했다.


  당시 원주에서 벌어진 대역사를 문난영(둘째 딸) 회장은 생생한 기억으로 증언하고 있다.


“ ,,, 그시절에 ‘신령과 진리로 예비하라’ 하신 성경 말씀대로 우리들 모두가 어찌나 신령 역사를 많이 했던지, 지금과 같은 맹숭맹숭한 상태에서 그때를 생각해 보면 참으로 신기할 지경이다. 예배시간에는 물론 보통 기도 시간에도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방언을 했고 방언 글씨를 썼으며(나는 지금도 그 때에 쓴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 때때로 어머니가 상경하신 일요일 예배시간에는 그날 서울에서 선생님의 설교 제목을 알아맞히기도 하여 우리는 어찌나 신기하고 신이 났는지 모른다. 이따금 영어 공부 시간에도 영어책을 읽다가 방언이 나오면 제재하느라 애를 먹었고, 중국말 방언을 하던 선배 언니는 중국 음식점에 짜장면을 먹으러 갔다가 느닷없이 방언이 터져 나와, 깜짝 놀란 그 주인이 어디에서 그렇게 훌륭한 공자님의 말씀을 배웠느냐고 자꾸 물어대는 통에 곤란을 겪은 일은 참 재미있었던 기억중의 하나이다. 또 어떤 날 저녁에는 식구들이 많이 모여 은혜의 분위기 속에서 예배를 보는데, 영수오빠 (72가정)에게 큰 역사가 일어나 그 육중한 몸집이 껑충껑충 뛰어오르는 바람에 천정에 뻥하고 구멍을 뚫어 놓기도 하였다. 그날 밤에 그 오빠가 선생님과 똑 같은 음성으로 우리들 하나하나의 심령 검토를 하며 호령을 하는데, 어찌나 속속들이 잘 알마 맞추었던지 우리들은 그만 두려워 쩔쩔매면서 모두들 엎드려 통성기도를 하며 회개를 하였다.”

<그리움은 본향으로>최정순 선생 고희기념 문집 220쪽


  선생은 결국 학교의 교직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갑작스런 변화로 혼란스러웠으나, 지상의 삶에 희망을 찾은 선생은 주저함을 떨쳐버리고 새출발을 시작했다. 새 진리 말씀에 감동된 학생들도 선생과 하나 되어 나섰다. 하늘의 심정으로 똘똘뭉쳐 전국 최초의 학생교회를 만들었다. 모두 다 은혜와 성령 충만으로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한 개척의 영웅들이었다.


  격변의 시대, 핍박과 고난 속에서 절대 믿음으로 승리한 최정순 선생의 놀라운 사적은 당시, 50년대 원주 교회를 통해 입교한 1세 지도자들의 면면이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아래는 최정순 선생이 1950년대 개척, 길러놓은 원주교회 식구들이다.


  김관해(72가정-홍순원), 홍순원(여), 김동원(남, 72가정), 김화수(여. 72가정-이경재), 박규남(남. 72가정-라우열), 김종문(남 72가정), 허일상(남. 72가정), 황순자(여, 유럽 43가정-김계환), 임규문(남 72가정), 김경범(기성 72가정), 백구섭(남 420가정), 김일환(남 430가정-나송자), 김옥수(여 430가정-정재은), 문난영(여 430가정-박노희)


  기라성 같은 젊은 청년들이 최정순 선생의 피와 땀과 눈물로 길러졌다. 50년대 개척전도 시대에 핍박 속에서 이렇게 많은 믿음의 자녀들을 지도자로 길러낸 사례는 한국 교회사의 역사적 기록으로 남을 만하다.


  3개월 만에 서대문 감옥에서 무죄로 석방되어 나오신 아버님은 원주 교회의 부흥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셨다. 여러 차례 원주를 방문하시어 식구들을 격려해 주셨다. 아버님이 원주로 내려오실 때면, 식구들은 대전도부흥회를 개최하여 심정의 불을 지폈다. 핍박을 받는 고난의 시대에 원주 교회의 부흥은 전국의 식구들에게 큰 힘이 되고 엄청난 격려가 되었다.


 어머니가 학교에서 억울하게 퇴직을 당하게 되니, 자연히 어린 딸들의 생활은 어려운 환경이 되었다. 그러나 문난영 학생은 승리했다. 다음 이어지는 문난영 회장의 이야기는 신령역사 보다 더 재미있는 사실 드라마의 한 토막이다.


  “어머니가 춘천 적십자사에 새 직장을 구하여 떠나셨지만, 나는 원주여고에서 학업을 계속해야 했다. ,,, 슬프고 억울한 마음을 달래며 공부에 매진하였다. 반에서는 물론 전교 수석을 놓지지 않았다.


  실력으로 버티니 선생들도, 친구들도 놀라고, 학교도 어쩔 수 없었다. 상을 받고 칭찬을 들으니 원래 친하던 친구들도 기뻐했다. 3학년이 되어 원주여고 학생회 운영위원장으로 당선되었다. 자연스레 상황이 반전되었다.


  학교에서 그렇게 훌륭한 선생(최정순 선생)을 쫓아내는 데 앞장섰던 사탄 같은 선생 둘이 학생들의 배척을 받고, 불신을 당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결국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부당, 불의한 두 선생을 학교에서 쫓아내는 일이 벌어졌다. 민망해하는 위원장에게 ‘민심이 천심이야, 미안해할 것 없다’며 친구들이 오히려 위로해 주었다.


  이렇게 단신으로 정의의 승리를 거둔 자랑스런 딸의 사연을 서울의 아버님도 기억하셨다. 후일 대학 입학금이 없어 등록을 포기한다는 말을 들으신 아버님은 협회장을 동원하여 즉시 등록금을 준비하도록 했다. 등록 마감이 되기 5분 전 쯤, 대학 교무살에 전화를 걸어 양해를 부탁하시고 등록을 마치도록 독려해 주셨다. 참으로 감사하고 신명나는 이야기다.


  초창기의 고난은 핍박에서 온 것 만이 아니었다. 핍박의 고난보다 더 지독한 것은 가난이었다. 가난은 민족 전체의 형편이었으나, 혼자 몸으로 딸들을 키우고, 교회를 개척하고 식구들을 돌보는 선생에게 가난은 참으로 가혹한 것이었다.


  “,,,. 그러나 어린 자녀들을 거느리고 교직을 버린다는 것은 다섯 식구의 생명선을 끊는 것이요, 그렇다고 생명길이라고 찾은 신앙을 버린다는 것은 더욱 못할 일이었다. ,,,.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말씀대로 죽고 사는 일은 오로지 하늘에 맡긴다는 심정으로 당당하게 사표를 쓰고 오랫동안 몸담았던 학교를 나왔다. 싸움을 일단락 지으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리고 생계는 막연했지만 오히려 개선장군이나 된 듯 마음속에 기쁨이 충만했다. 내가 이토록 과감하게 용단을 내릴 수 있도록, 어린 아이들이 우리들의 고생은 생각하지 말고 어머니가 찾으신 생명의 길을 끝까지 밀고 나가라고 나를 격려해 주니 더욱 힘이 솟으며 감사했다. 본부에 가서 선생님께 보고를 드리니 기뻐하시는 모습에 더욱 용기를 얻고 기쁨을 느꼈다.


  그때부터 조소와 비난에다 생활고마저 겹치게 되니 고통은 날로 심해졌다. 어린 학생 식구들이 도시락을 싸다가 부엌에 놓고 가면 그것으로 끼니를 잇고, 보리밥이나 고구마 한 덩어리로 허기를 달래며 죽지만 말고 생명만 연장해 가자고 어린 것들을 위로하며 달래었다. 하늘의 역사인지 어린 아이들까지도 한마음 한뜻이 되어 굶주리며 냉방에서 잠을 자더라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으며, 공부방은 물론, 잠을 편히 잘 수 있는 방 하나 없어도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고생을 하여도 항상 은혜로운 분위기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생활을 했으니, 그 모두가 하늘의 은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춘천 적십자사에 새로운 직장을 얻어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춘천교회 역시 마음 놓고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방 한칸이 없어 애를 태우는 시절이었다. 마침 이월성 장로님이 춘천교회로 오시게 되어 식구들이 마음을 모아 천신만고로 성전을 겨우 마련하였다. 춘천시 교동 산 5번지, 외따른 언덕빼기에 성전을 세우며 또 한번 피눈물 나는 고생을 하게 되었다. 특히 이 장로님과 함께 밀국수로 연명을 하며 흙벽돌을 찍은 황대성씨(430가정)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고생이 많았다.


  ,,,. 그 시절 식구들이 얼마나 가난했던지 고추장을 담아 먹는 식구 하나 없어서 선생님이 순회 오시면 사회 친구들에게 고추장을 얻어 음식을 장만하곤 했으니, 그 눈물겹도록 안타까운 사정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선생님을 뵙고 싶어 강원도 각지에서 모여드는 식구들을 대접하 려면 언제나 솥에서부터 숟가락에 이르기까지 나의 직장인 적십자사에서 빌리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애를 태우던 순간들이 너무나 많았다.


  1960년도 여름, 전국에 전도 대원을 내보내시고 순회하실 때의 일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의 40일 전도 기간중에는 선생님께서도 순보리 진지와 된장만을 드셨다. 미국 식구들도 된장 대신에 콩을 삶아 먹고, 침대에서도 자지 않았던 때이다.


  선생님께서 순회를 오시니 모처럼 모시게 되는데 보리 진지를 해드릴 수 없어 쌀밥을 해드렸다가 보리밥이 아니라고 드시지 않기에 다시 보리를 섞어 진지를 해드렸는데, 쌀알이 섞였다고 하시며 드시지 않으셨다. 결국 보리 미숫가루를 타서 요기만 겨우 하시니 우리들도 굶고 말았다.


  다음 선생님의 행선지가 원주였기 때문에 교회장인 김관해씨(72가정)에게 ‘순보리 진지 대접’이라는 전문까지 치게 된 사연은, 두고두고 마음 아픈 일화로 남아지게 되었다.


  ,,,. 큰 딸 순영은 의학 공부를 하고 싶어 했으나, 대학의 입학원서 사러갈 돈도 없어 쩔쩔매던 우리 형편으로서는 그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뜻 앞에 헌신할 것을 생각했으나, 자기마저 그러면 동생들 공부는 누가 시키겠느냐면서 대학을 마친 후, 돈을 벌어 동생들 공부는 자기가 맡겠다는 것이었다. ,,,.


  눈보라가 몹시 몰아치던 날 저녁, 느닷없이 춘천으로 내려와 눈물을 뚝뚝 흘리던 순영의 모습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아픔으로 남아 있다. 날씨가 추워졌는데도 코트 하나 사 입을 형편이 못되어 얇은 스웨터 하나 바람으로 덜덜 떨고 다녔던 것이다.


  ‘추운 것은 문제가 아니예요. 추운 것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요. 그러나 보는 사람마다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은 참을 수가 없어요’하며 눈물을 계속 흘리는 바람에 내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 그 어린 심성에 너무나 많은 고통과 짐을 지게 하였다는 자책이 나를 괴롭혔지만,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우리들 개개인이 겪는 시련이 아무리 크다고 한들 하늘의 사정에 견줄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두 모녀가 앉아 마음을 달래는 길밖에 없었다.


  그리고 돈을 빌려 순영에게 주었다. ,,. 그렇게 하여 해 입은 코트를 다 낡아 없어질 때까지 난영, 혜영이가 물려 입었으니,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리움은 본향으로>최정순 선생 고희기념 문집 59-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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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정순 선생의 <고희기념문집>은 한줄 한줄에서 역사적 사연과 섭리적 심정이 가득히 넘쳐흐르고 있다. 원주 고을을 ‘원리의 고을’로 만들었고 말씀으로, 사랑으로 수 많은 지도자들을 품어 길러냈다. 선생은 위대한 스승이었고, 참사랑의 어머님이었다. 선생을 회고하는 식구들의 한결 같은 고백에서 선생의 사랑과 인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누구에게도 추천서나 격려의 글을 써주신 적이 없는 신애 충모님, 최원복 선생께서 <고희기념문집>을 축하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주셨다.


“나는 축하의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의 친구요, 믿음의 딸이기도 한, 정순씨를 대하여는 경우가 다르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고 쓸 글이 넘쳐 난다.,,,. 지금 나는 정순씨를 생각하며 곡절 많은 세월 속에 종과 횡으로 피와 땀과 눈물에 적신 씨날을 엮어서 이룩한 우리 교회 역사를 회고한다. ,,,.


  굳게 다져놓은 인격의 터전 위에 소리 없이 서로 도우며 하늘에 닿는 학문의 탑을 높이고 딸들 네 자매는 지금 각가 뜻안에서와 아울러 사회에서 훌륭한 인재들이 되어 있다. ,,. 세월이 흘러서 어느덧 고희를 맞는 오늘, 효자 효녀들의 정성을 부어 단심주(丹心酒) 차고 넘치는 축배를 기울일 제 무색한 잔이 낯을 붉히고 참석한 우리 모두의 가슴도 뜨겁다. 효녀로서 영원히 복되시라. 나도 잔을 높이어 이렇게 축원한다!!”


  ‘무색한 잔이 낯을 붉힌다’. 얼마나 아름다운 심정의 표현인가. 두 분의 정이 얼마나 애틋한 것인가를 잘 나타내는 감격의 언어다.


   선생의 믿음의 자녀들은 축복을 받고 통일운동의 선배가정이 되어 60년대 1차, 2차 7년 노정의 선구자들이 되어 한국 선교사에 큰 족적을 남기었다. 그 믿음의 자녀분들이 보내온 축하의 서신에는 하나의 공통어가 있다. ‘사랑하는 최정순 어머님께 감사드립니다. <고희기념문집> 출판을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한결같이 모두 다 ‘최정순 어머님’이다. 어머니의 사랑으로 식구들을 품어 기른 선생의 고귀한 헌신에 대한 한없는 감사의 심정으로 흘러넘친다.


  고난을 이기고 승리한 위대한 인물의 이야기 <<그림움은 본향으로>>-최정순 선생 고희 기념문집- 일독을 권하며 더 많은 사연과 사적을 다 소개하지 못하는 아쉬운 마음으로 기록을 마친다.


  최정순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2026년 10월 25일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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