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요한 목사님의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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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9월4일 평북 선천군 출생
통일교회 1호 목사: 1954년 아버님께서 직접 목사안수를 해주심.
이요한 목사님은 통일교 목회자의 상징이요, 대표자요, 표상이라 할 만한 어르신이시다.
일제의 한국 식민통치가 점점 강화되면서 많은 조선인들이 조국을 떠나 만주(중국의 동북3성)으로 이주하였다. 목사님이 7살 되던해 1923년, 가족이 중국 요녕성 심양으로 이주했다.
1939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까지 16년간 중국에 살며, 생업을 도우며 신앙생활에 열심을 다하였다.
성서 연구, 신학공부, 설교와 전도는 그의 천직이었다. 교회에 목사가 없을 때는 자연스레 대신 설교를 하고 교인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18세 때였다. 어는 순간에는 설교하는 것이 당연한 자신의 모습이라 생각되고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생계를 돕기위해 세상 일을 할 때도 성경공부와 하나님을 모시는 종적 신앙을 지켰다. 하나님이 동행하는 생활이었다.
목사님의 청년시절은 일본이 한국에 이어 중국의 만주-동북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을 지배하던 때였다. 조선말을 금지하기 시작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던 때, 한국말로 설교를 하여 교인들에게 은혜를 주어 소문이 났다. 젊은 전도사의 설교에 능력이 있음을 알아본 한 일본 형사가 “한국말로 설교를 하면 안된다. 내가 추천해 줄터이니 일본으로 유학을 가라”. 하나님이 동행하시니 이런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보통 사람은 꿈도꾸지 못하는 일본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1939년).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일이 일어나니, 더욱 하나님께 의지하는 마음이 들었다. 더욱 신앙에 집중하였다.
일본의 유학 생활도 하늘의 뜻을 알고 따르려는 노력의 연속이었다. 신학교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으니,하나님께서 동의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못하겠습니다.”고 밝혀, 화난 교장은 제적 처분을 했다. 군수공장으로 쫒겨나 중노동으로 고생을 하였지만 사실은 전화위복이었다. 학교에 남아 신사참배를 하던 학생들은 집단으로 징집되어 남태평양 전선으로 가 대부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악명 높은 일본 헌병대 체포조가 와서도 방안에 있는 목사님을 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기도 했다. 전쟁 말기가 되어 나고야에 미군 폭격이 대대적으로 시작되기 직전, 나가노로 이사를 가게된 것도 하나의 기적이었다. 하나님의 가호하심을 실감하는 일들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위기와 기적의 연속이었다. 하나님이 동행하는 일본의 생활이 6년 되어갈 무렵 2차대전이 끝이 났다.
(자전 <천애로 인도받은 삶>에 기록된 이요한 목사님의 신앙을 요약해 소개한다.)
1945년 해방정국은 남북분단과 38선으로 혼란스러웠다. 종교계에서는 새로운 계시를 받는 영통인들이 많이 등장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해 ‘한국에 재림주님이 오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때가 차 새로운 섭리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징조이기도 했다.
영통하는 아주머니가 목사님을 찾아와 “당신은 주님이 오신다는 계시를 몇 년전에 언제,어디 어디서 받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오신 주님을 찾지 않고 가만히 있느냐”야단을 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아주머니는 “내가 하나님이 보내서 왔는지 아닌지는 내일 오후 2시 뒷산에 올라가 보면 알 수 있다. 맑은 하늘에 쌍무지개가 뜨면 내가 하늘이 보낸 징표인 줄 알라”고 말했다. 이튼날 예배를 마치고 교인과 주일학생 20여명이 함께 뒷산으로 올라갔는데, 그 아주머니의 말 대로 맑은 하늘에 쌍무지개가 떴다. 모두가 신기해하고 놀라워했다. 이에 경각심을 갖고, 계시록을 읽으며 설교하니 은혜가 넘쳐 많은 신령역사가 예배시간에 일어났다.
목사님에게도 직접 몽시, 계시가 내렸다. “한국에 주님이 오신다. 아무 걱정하지마라. 기성교회, 개신교회를 중심한 섭리는 끝났다”, “하나님의 촛불이 옮겨졌다.” 는 계시를 꿈을 통해 받았다. 또 몽시에 신문배달원들이 “호외요, 호외”라고 외치며 신문을 나누어 주는데, “한국 주 재림!”이라는 글씨가 대문짝만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주님을 만날 날이 가까워지고 있어던 것을 아버님을 만나고 난 후에야 그제서 확실히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재림주님을 만나기 전에 목사님이 해야할 일이 더 남아 있었다. “피난민 속에 섞여 제주도로 가라”는 계시가 내렸다. 제주도 피난민 수용소에 모여있던 사람들 가운데는 하늘이 섭리를 위한 준비한 신실한 기독교 인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제주도 서귀포 벌판에 천막 생활에서도 매일 예배를 드렸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많은 신령역사가 일어났다. “주님을 만나려거든 이 선생을 따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생겼다. 비몽사몽간에 방언이 마구 튀어나왔다. 이목사님이 바로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나중에 아버님을 뵙고 나서야 그 때의 신령역사가 가지는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제주도에 갔기에 초창기 중심 식구갈 될 이봉운 장로 가정, 오영춘 권사등을 만났던 것이다.
이요한 목사님은 늘‘ 신앙인은 늘 영적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살야야 한다. 주파수가 맞으면 하나님의 방송이 들린다’고 하셨다. 마침내 주님을 만날 날이 되었다. 아버님이 부산에 도착하는 순간(1951년1월27일) 섭리의 운세는 부산으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그해 8월에 범일동 토담집을 세우니 영계의 방송이 귀있는 자에게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새 진리를 전하는, ‘이단’ 소리는 듣는 청년-“평양청년”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목사님은 아버님이 계신 부산 범냇골을 찾아들었다. 수소문하여 마지막 집의 문을 덜컥 여니, 아버님이 “이선생이 올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마디 하셨다. 이 한 순간의 만남을 위해 하나님께서 30여년간 이목사님을 보호하시고 기르시며 인도해 나오셨던 것이다. 지나온 모든 과정이 하늘의 역사라고 볼 수 밖에 없었다. 그 역사적 순간로부터 ‘주님’을 섬기는 이요한 목사의 평생이 시작되었다. 절대믿음, 절대순종의 도리를 따라 통일교 식구들의 본이 되었다.
목사님은 남한에서 제일 먼저 메시야 아버님을 만나 통일교인이 된 (1952년12월1일) 남자식구다. 목사님은 곧바로 제주도 피난중에 만난 신우 이봉운 장로에게 서신을 띄워 부산으로 나오라고 연락했다. 장로님은 하나님이 ‘계시로 정해주신 출발 날짜’에, 전 가족을 데리고 부산으로 나왔다. 아버님을 뵙고 목사님처럼 주저함 없이 그대로 통일교인이 되었다. 전가족이 입교한 첫 번째 역사기록이다.(1953년4월).
아버님이 손수 지으신 범일동 토담집에는 평양에서부터 아버님을 모신 김월필 선생, 옥세현 할머니, 강현실 전도사 있었다. 아버님의 유일한 친우 엄덕문 선생, 오영춘 권사, 이득삼씨, 김성실씨 그리고 기성교회에서 잘믿어보자고 애쓰는 권사님들이 전도되기 시작하면서 가정예배를 통해 통일교회의 초창기 심정공동체 시대가 열렸다.참부모님의 성약시대-천일국 섭리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유효원 선생이 전도되어 원리를 공부할 즈음, 부산에서 식구들이 많이 늘어났다. 대부분 기성교단에서 잘 믿어보자고 했던 사람들이다.
이요한 목사님은 아버님의 명을 받아 1953년 8월 대구로 개척전도를 나갔다. 통일교 첫 개척 전도사다. 대구는 다시오시는 주님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신실한 기교인들이 많았다. 북한에는 평양이, 남한에서는 대구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대구가면 지승도씨(1895년-1974)를 찾아가라”는 아버님의 지시가 있었다. 아버님께서는 자주‘ 어떤 목사를 찾아가라, 어떤 장로를 찾아가라, 교수를 찾아가라’는 지시를 목사님께 하셨다. 주님의 명을 따라 무수한 신령한 집단을 찾아가 중심인물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감동을 주고 환영을 받았다. 때로는 ‘이단’, ‘가정파괴자’라는 누명을 쓰고 맞고 쫓겨나기도 하였다.
이 때 장덕기 권사를 비롯하여 많은 권사님들이 인연되었다. 기성교단의 반대, 시련가운데서도 1년사이에 100명의 식구가 모여 예배를 보는 교회로 발전하였다. 식구들은 은혜속에서 뜨거운 심정으로 똘똘뭉쳐 살았다.
교회에 오면 마음이 편하고 사정이 통하고 밥맛도 좋고 살맛이 나는 초창기 교회의 은혜가 넘쳐났다. 아버님께서 목사님께 ‘이요한 목사’라는 정식 직분을 안수해 주셨다(1954년). 우리에게 정식 명칭이 없어 사람들이 ‘이요한파’라는 소리는 듣는다고 아버님께 말씀을 드리니, “우리는 모든 것을 통일하려고 하니까, 이제부터<통일교회>라고 하면 좋겠다”는 말씀을 내려 주셨다. ‘통일교’의 시작은 대구인 셈이다.
그리고 동아일보에 보도된 통일교회 소식을 보고 정석천 장로님 가정이 입교한 것도 이때였다.(1955년 6월 25일).
이목사님은 아버님을 모시며 당신의 영험하심을 실감하였던 많은 증언을 하였다. 그 가운데 기록자의 기억에 생생한 증언 세가지를 소개한다.
아버님은 하나님의 심정에 사무쳐 사시고 하나님의 사정에 공감하고 통곡의 기도를 하신다. 이 시절에 아버님을 만나는 아주머니 권사님들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무조건 경배를 하고 그냥 통곡하며 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신기하기도 해서 목사님이 귀가하는 아주머니에게 “왜 그렇게 울었느냐”고 물어보았다. “나도 몰라요, 문선생을 만나는 순간, 하늘이 울리니까 울었습니다”는 대답이었다. 정성을 드리는 분들이라 아버님을 만나는 순간 하늘의 사정과 심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목사님이 더욱 놀랐던 것은 영계를 주관하시는 아버님을 경험한 일이다. 이목사님이 중국에서나 평양에서, 제주에서 예배를 인도할 때 방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선생을 따라가야 한다”는 방언도 들었다. 그러나 영적 역사, 신령역사는 영계의 주도하에 벌어지는 것이라 한번 시작하면 막을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다. 예배 때 누군가 방언을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예배를 다시 시작하곤 했다. “좀 조용히 합시다”해도 멈추는 법이 없다. 그런데 범냇골에서 한번 예배시간 방언이 터졌다. 그런데 아버님이 “조용히 해” 한마디 하니 신기하게도 방언이 딱 멈추는 것이었다. 이요한 목사님은 큰 충격을 받았다. ‘아, 아버님은 영계를 완전히 주관하시는 분이구나. 나는 아무리 해도 못한 역사를 저렇게 간단히 하시는 분이구나’. 더욱더 절대 순종의 마음을 다지게 되었다.
더 놀라운 일은 서울에서 있었다. 아버님은 영계를 통하시며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찰하시는 분이다. 본부에서 수련비가 없어 쩔쩔매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한 아주머니가 교회 문앞에서 “여기가 통일교인가요?”물었다. 마침 이목사님이 문앞에 있었다. 처음보는 분을 맞이하여“어떻게 오셨는가요?”하니, “이 돈을 통일교에 갖다 주라는 계시를 받고 왔어요” 그 부인을 인도하여 아버님을 뵈었다. 아버님께서는 보시자 마시자 “왜 인제왔느냐?”고 호통을 치시는 것이었다. 멋도 모르고 야단을 맞은 그 부인은 모아온 ‘계돈’를 놓고 정신없이 나갔다. 아버님은 몇일 전부터 그 여인이 올 것을 알고 몹시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처음보는 부인을 인사도 없이 야단치시는 아버님, 목사님도 그 부인 못지 않게 놀랐다고 한다. 초창기 식구들은 이렇게 메시야 아버님을 실감하는 경우를 많이 경험했던 것이다.
아버님 앞에서 주일 설교를 자주 하신 분도 이요한 목사님이었다. 유효원 협회장님은 원리강의를 하고 식구들은 ‘간증’을 했지만 설교를 시킨 사람은 이목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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