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전 김영운 선교사 <2부>
최종 수정일: 7월 22일

- 김영운 선생의 생애 간증-
[ 나는 1915년 대한미국 북쪽의 황해도에서 기독교를 모르는 집에 태어났다. 14살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인생의 목적이 몹시 궁금했다. ‘왜 사나, 무엇을 위해 사나’하는 의문이 나를 몹시 괴롭혔다. 나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걸까? 어디로 가는 걸까?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 어리석은 생각이라 느껴 다시 공부에 집중하기로 했으나, 똑같은 질문이 반복해 떠올라, 곰곰이 생각하고는 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걸까?
그때 나는 누나네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는데, 누나네 집은 아주 부유한 집안이었다. 매일 재산을 모으는 데만 신경을 쓰는 형부의 탐욕스런 태도가 눈에 거슬렸다. 진정한 행복이나 기쁨이 없어 보였고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일본에서 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온 유학생들의 우쭐해 하는 모습도 싫었다. 교육이 정말 좋은 인격을 만들어주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주변의 부부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고 그저 연명하는 것처럼 보여, 어린 나이에 이미 청춘의 행복이 시시해 보였다. 삶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나는 종종 산길을 걸으며 혼자 기도를 했다. "신이 있다면 답을 주실 텐데. 신이 없다면 삶은 무의미하고 살 가치가 없는 거잖아."라고 생각했다. 때로는 "신이 있다면 제발 나타나 주세요."라고 외치기도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한여름날, 우리 집 마당의 등나무 정자 아래 혼자 서 있는데 갑자기 오른쪽에서 "그분은 너를 사랑하신다, 너를 사랑하신다.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다."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분명히 들리는 음성이었지만 사람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일주일도 안 되어 그 음성이 또 다시 들려왔다. 어디서 들어본 거지? 문득 내가 10살이나 11살 때 두세 달 정도 다녔던 주일학교에서 불렀던 찬송가 구절이 생각났다. 나는 교회 주일학교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만 두었고, 다시는 주일학교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래서 친구들을 피해, 작은 일본 교회에 몰래 들어가 예배에 참석했다. 목사님이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하셨고 나는 조용히 두세 소절을 따라 불렀습니다. 그때 또 음성이 들렸다. "네가 나를 찾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찾은 것이다." 는 소리에 이어 " 내가 너를 찾았다. 네가 방황하던 그 골짜기들, 그 언덕들, 그 외로운 곳들을 내가 찾았다"는 음성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내가 언덕을 헤매며 그분을 부르짖던 모든 시간 동안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셨단 말인가?’ 그날부터 내 마음은 하나님으로 가득 찼고, 온통 하나님 생각으로 채워졌다. 새벽이 되면 나는 다시 언덕으로 올라가 기도했다. 매일 아침 나는 그곳에 올라가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개인 기도를 위해 밤에도 문을 열어준다는 한국 교회에 몰래 들어가 기도를 시작했다. 밤 10시쯤 담요를 가지고 갔다. 카펫도 깔개도 없는 맨바닥이었지만, 겨울이든 여름이든 그곳에 가서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뭔가에 이끌린 듯 매일, 몇 달을 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겨울밤 새벽 1시, 기도 중에 내 앞에 거대한 십자가가 보이고 그 십자가에 예수님이 매달려 계신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십자가 발치에 무릎 꿇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용서를 빌며, 내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도덕적으로 아주 순수했다.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이 십자가 앞에서 너무나 무력하고 비참한 기분이었다. 나는 용서를 빌며 하염없이 울었다. "당신이 나를 위해 고통받으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 고통받으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영적체험이었다.
밤새 기도를 하고 새벽 5시쯤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 날 온 세상이 다른 세상으로 보였다. 똑같은 나무들조차 다르게 보였고 집들, 새들, 꽃들, 풀들, 심지어 태양까지도, 마치 내게 말을 거는 듯했다. 온 세상이 나를 위해 창조된 것 같았다. 전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세상이 내게 말을 걸고, 나도 그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내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몇 달 후 부활절 전날 밤이었다. 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꼭 뵙고 싶었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보았고,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싶고, 그분과 함께 부활하고 싶었다. 이 강렬한 생각이 나를 교회로 이끌었고 나는 부활을 간구하며 기도했다. 오후 1시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고, 막달라 마리아도 나타났다. 그녀가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려고 했을 때, 주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만지지 말고,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부활했다고 전하여라."
그 부활절의 모든 장면이 내게 나타났고, 마치 내 안에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기도할 수 없어 일어나 부활 찬송가 "그가 부활하셨네, 그가 부활하셨네"를 불렀다. 온몸으로, 아마도 수십 번은 반복해서 불렀을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주님의 사람이다’는 생각을 하며 살게 되었다. 내가 어떤 일을 하든, 농사를 짓든, 사무직이든, 가정주부든, 그 무엇이든 간에, 부활하신 주님을 온 세상에 선포하고 알리는 것이 내 사명이라는 생각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작은 은행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어느날, 이용도 목사님의 설교를 듣기 위해, 한국 감리교회로 갔다. 그의 지적이면서도 열정적인 말씀 속에서 나는 성령의 임재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설교에는 회개를 촉구하는 심판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지만 그의 단호한 말씀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담겨 있었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녹아내렸다.
이용도 목사는 겸손하고 온유하며 과묵한 사람이었으나, 일단 강단에 서면, 웅변적이고 역동적이며 열정적인 설교자가 되었다. 그에게 광신적인 면모가 전혀 없었지만 그의 설교를 듣고 방언을 하는 사람, 예언하는 사람, 황홀경에 빠지는 사람도 많았다. 그는 기도하는 목자였고, 굶주린 영혼들을 향한 연민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용돈을 모두 거리의 거지들에게 주고는 버스비도 없이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의 높은 영적 분위기를 따라갈 수 없는 기성교회 지도자들은 이용도 목사가 교회를 분열시킨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교단에서 추방되었고, 폐암으로 1933년 32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용도 목사는 나의 신앙의 본보기가 되었다. 존경할 만한 위대한 사람을 만난 기쁨이 컷고, 그의 기도와 열정, 순전한 은혜는 내 마음에 깊이 새겨져, 언제나 그런 참된 지도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여기 저기 찾게 되었다. 예수의 모습을 닮은 이용도 목사 같은 분이 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은 숫자로 일하지 말고, 사람의 삶으로 일하라." 는 음성이 들려, 생명력이 없는 은행 일을 그만두었다. 학교 선생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서울로 가서, 교사 양성 과정을 수료하고 시험에 합격하여 교사가 되었다. 가르치는 일은 나의 천직 같았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너무 재미있고 즐거웠다. 온 마음을 다해 교육에 전념했다. 좋은 선생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내가 학생들에게 마음을 쏟고 학생들도 내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나는 한 영적인 그룹의 기도 모임에 참석하여 아주 특별한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열심있는 기독교인들은 모이면, 영통을 하고 방언을 하며, 직접 메시지를 전하곤 했다. 누군가는 목소리를 듣고, 누군가는 환상을 보고, 치유의 능력을 경험했다. 우리는 은사를 통해 "내가 너희들을 위해 준비시키고 있다. 내 영을 부어주고 있다. 이 세상에 위대한 일, 위대한 변화가 곧 일어날 것이다”는 말을 들었다.
여기에서 그들과 함께 스웨덴보르그의 "천국과 그 경이로움", "신성한 지혜와 신성한 사랑", "신성한 섭리"를 읽은 것도 큰 은혜였다. 이 책들을 통해 영적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영적 경험까지 더해지니 심신의 풍요함을 느꼈다. 우리가 신성한 진리를 이해하고 따라 살아야 하며, 권력, 지위, 돈, 또는 어떤 보상도 아닌 사랑과 진리, 그리고 오직 신을 위해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는 스웨덴보르그의 메시지는 내 신학의 기초가 된 가장 소중한 진리였다.
공부를 더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일본 관서대학 안의 감리교 신학교에 등록하여 5년간 신학 공부를 했다. 과거와 현재의 위대한 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명했는지, 교회의 역사, 교리사, 조직신학, 신약과 구약 등을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흥미로웠다. 그러나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것만 공부하고, 영적인 삶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그런 자유주의적 신학에는 한계가 있음을 느꼈다.
하나님께 "왜 이런 공부를 해야 합니까? '이 공부로 내가 뭘 할 수 있습니까? 내 영적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데. 이 공부로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영적 삶을 구원하며 도울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너는 원수의 무기를 알아야 한다."고 대답해 주셨다. 신학교에서 목사님들이 어떻게 설교를 준비며, 어떻게 설교하는지 아는 것은 유익한 일이었다.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성서학 분야에 대해 성실히 공부를 계속하여 신학의 학문적 이해도 깊어갔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기독교 여성집사 양성소에서 초청을 받아 2년 동안 가르쳤다. 그때는 이미 일본과 미국 사이의 2차세계대전인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고,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어 위기가 감돌았다. 이런 때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기도했으나 하나님은 내내 침묵하셨다.
전쟁 중에는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다. 식량은 부족했고, 일본 정부의 압박은 심해져 모든 분야의 지도자들이 어려움을 당했는데, 특히 교회 지도자들은 심한 감시를 받았다. 절망속에서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이 전쟁에서 일본은 패배하고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그렇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일본 정부의 발표를 들으면, 희망이 안보였다. 일본 정부에 의해 라디오까지 압수당해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도 없었다.
그 약속된 날이 1945년에 마침내 왔다. 그런데 일본으로부터 해방된지 일주일 만에 러시아군이 북한으로 진격해 왔다. 남쪽은 미군이 들어와 나라 땅이 분단되었다. 북한에 있던 우리들에게 상황은 전보다 더 나빠졌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너희의 진정한 해방은 나중에 올 것이다"라는 음성을 들었다. 우리는 남쪽으로 가라는 계시라 생각하여 몇몇 교회 신도들과 함께 남쪽의 서울로 피신했다.
새로 개교한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인 김헬렌 박사(김활란 총장)가 나를 찾아 왔다. 그녀는 새로 개설한 사회복지학과에서 와서 종교 과목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렇게 이화여자대학교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대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여자대학이었고 3천명의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신약성서, 교회사, 비교 종교학을 가르쳤다. 젊은 여학생들을 상대로 설교하고 신학을 가르치는 것은 흥미롭고 보람이 있었다.
그 때 대학에서 함께 가르치는 캐나다인 선교사가 나에게 캐나다 유학 장학금을 제안했다. 나는 이를 받아들여 1948년 토론토 대학의 임마뉴엘 신학대학원 과정에 들어갔다. 2년의 신학 공부를 끝내고 한국으로 귀국 준비를 하고 있을 바로 그때, 한국 전쟁 소식이 들려왔다.
아침 10시쯤, 라디오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말도 할 수 없었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온몸이 마비된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또 음성이 들렸다. "내가 내 남은 자들을 보존하리라. 내가 내 남은 자들을 보호하고 지키리라". '남은 자'라는 말은 성서 이사야서의 말씀이다. 모든 유대인이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을 때, 예루살렘에는 보잘 것 없는 소수의 사람들만 남았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가 이 남은 자들 가운데서 강한 민족을 일으키리라"라고 약속하셨다.
보잘 것 없는 ‘남은 자들을 보존하리라’는 음성을 듣고, 나는 새로운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죽임을 당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선한 자들의 씨앗, 의로운 자들의 씨앗을 숨기고 보호하고 보존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다. 전쟁 때문에 장학금이 1년 더 연장되어 계속 학교에 있었다.
3년이 되어 한국 전쟁도 끝이나고 있을 무렵 선교회에서 유럽을 보고 갈 것을 제안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또 다른 나라인 독일로 가서 독일인들이 어떻게 재건 운동을 하고 있는지 가서 직접 보고 가라는 것이었다. 지금 한국은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지금 집으로 가면 낙담할 뿐이니, 전후의 유럽을 보고 가라는 이 제안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래서 혼자 독일로 갔다. 독일에서 국가 재건 사업을 살펴 볼 수 있었고, 그 뿐만 아니라 슈투트가르트와 베를린에서 열린 여러 국제 기독교 회의, 즉 에큐메니컬 운동등 여러 활동에 참석하기도 했다. 스위스에서 열린 두 번의 큰 회의에도 참석했다. 그렇게 독일과 스위스에서 거의 6개월을 보내며 많은 것을 학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영국으로 가서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몇몇 신학교를 둘러볼 기회도 있었다.
유럽 여행 중에 유럽 및 다른 나라의 최고위 기독교 지도자들과 국제 회의에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우리는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토론했다. 유럽 교회는 젊은 이들이 떠나고 텅 비어 있었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 유럽 여행 내내 이런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에 있는가?
1952년 2월에 무거운 심정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전쟁의 총성은 멎었지만, 수백만 명의 피난민들이 남쪽 부산으로 몰려들었고, 이화여대도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그곳을 '망명 대학'이라고 불렀다. 천막을 치고 수업을 했는데, 교실의 바닥도 땅 바닥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음식 변화 때문인지, 도착하자마자 심한 설사가 시작되었다. 온갖 약을 다 써봤지만 소용이 없었고 결국 만성 설사로 이어졌다. 거기다 기관지염까지 걸려 기침도 계속 나왔다.
휴전 직전에 우리 대학교는 서울의 옛 캠퍼스로 돌아왔다. 김활란 총장님은 허약해진 나에게 캠퍼스 안에 작은 방을 하나 마련해 주었다. 하루에 한두 시간씩 강의를 하고 하루 종일 거의 누워 지냈다. 설탕물을 주사로 간신히 연명을 하며 수업을 해냈지만 더이상 서 있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결국 대학교에서 병원에 입원시켰다. 좀 나아진 듯 하여 병원에서 퇴원하면 모든 증상이 다시 나타났다. 10분의 기도도 힘들었다. 결국 사직서를 제출 했지만, 대학은 나의 사직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 때도 한밤중 1시였는데,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이것이 영적 위기다." 자주 듣는 그 목소리였다. "이것이 영적 위기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 ‘영적 위기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냥 침대에 누워 고통을 참아야 했다.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육체적으로는 회복될 희망이 없었다. 그런데도 의사는 내 몸에 아무런 기능적인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하니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아직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주님, 뭔가 이루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 사명은 아직 완수되지 않았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육신의 고통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눈물의 기도를 계속하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것이 그 때까지 나를 기르시고 연단시켜 나오신 하나님의 최종적 훈련 단계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지상 생의 마지막에서 하늘을 붙들고 호소하는 그 자리에 하늘이 나의 손을 잡으신 것이다.
그 절망의 시간에, 친구 한사람이 찾아와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지금 시내에 있는 한 젊은이가 지난 20년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았고, 이제 그 계시를 풀어놓고 새로운 진리를 전하고 있어요. 그 새로운 진리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이미 지상에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셨고, 신약 시대는 끝났다는 거예요. 이 새로운 시대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상의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고 계신대요. 꼭 와서 그 사람의 계시를 들어보고, 이게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온 진리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왜, 뭘 더 배워야 할 일이 있을까 하는 자만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그렇게 느꼈지만, 속으로는 누군가가 하나님께 계시를 받았다는 데 질투심 같은 마음도 들고, '나보다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누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았을까?'호기심도 생겼다. '계시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인데, 그가 무슨 계시를 받았다는 말인가', 알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나는 그 때 방에서 방으로 옮길 수도 없는 신체였다. 그 친구가 '내가 업고 가겠다'고 하여, 가보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가겠다고 약속한 바로 그날 밤, 복통이 찾아와, 밤새도록 앉아 있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가서 3주 동안 입원했다. 3주 후 퇴원했는데, 설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이 다시 와서 꼭 가야 한다고, 재촉을 했다. 나는 이미 희망이 없으니, 가다가 길거리에서 죽더라도 한번 가보자는 생각을 했다.
나는 통증 약을 챙겨 따라나섰다. 그날 오후 2시 쯤부터 ‘말씀’을 듣기 시작했다. 그 메시지의 첫 부분은 내가 좋아하는 스웨덴보르그가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지혜"에서 말한 내용과 매우 비슷했다. 그래서 그 ‘선생’이라는 분에게 "스웨덴보르의 책을 읽어보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아니요, 읽어본 적은 없지만 영계에서 그를 여러 번 만났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스웨덴보르를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러더니 내가 스웨덴보르를 몹시 존경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스웨덴보르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높은 위치에 있지 않아요. 스웨덴보르가 말한 것의 80%는 틀렸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뭐라고요? 내가 그토록 존경하는 스웨덴보르가 틀렸다니, 불쾌한 생각도 들었지만,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지금까지 내가 공부하고 가르친 내용과 많이 달랐기에, 나는 ‘이 계시의 출처가 어딘지, 또 어떻게 받으셨는지 너무도 궁금했다. ‘선생님’은 주위의 교인들을 불러세워 자신들의 영계 체험을 얘기하라고 했다. 학식이 풍부한 여대생과 남학생, 학력 없으나 '계시를 받았다는 노인네들, 다양한 사람들이 와서 자신들이 계시 받은 일들, 영통하여 본 영계의 아름다운 모습, 지옥의 실상, 치유의 경험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들의 놀라운 간증을 들었다.
그들의 경험담은 내가 스웨덴보르그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과 나의 영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훨씬 진정성 있고 놀라운 경험들이었다. 나는 부인할 도리가 없었다. 둘째 날 나는 매우 겸손한 마음으로 ‘새말씀’을 계속해 달라고 부탁했다. 진지하게 들었다. 타락의 역사, 예수님의 십자가, 하나님의 한과 눈물의 구원섭리 역사, 놀라운 성경 해설이 쏟아져 내렸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셋째 날 나에게도 역사가 벌어졌다.
셋째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심하던 설사와 복통이 언제 있어느냐는 듯 완전히 멈추고 몸의 붓기도 모두 가라앉아 있었다. 속이 너무 편해 그날 아침 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거의 1년만에 일어난 기적이었다. 그리고 식욕도 생겨 생선, 돼지고기, 그리고 매운 김치로 밥을 먹었다. 소화도 100% 잘 되었다. 치유라는 말을 들은 적은 있으나,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그래서 ‘선생님’께 물었다. "저는 치유를 구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죠?"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 새로운 시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신약 시대보다 100% 더 강력합니다. 이제 당신은 비록 내키지 않더라도 이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였고,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당신의 영에 역사하기 시작하여 당신의 몸에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대단한 일 아닙니다. 여기 머물면서 이 모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세요." 어쨌든 나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뻤고, 너무나 감사했다. 누구보다도 2년 10개월 동안 고통받는 딸을 보던 나의 어머니가 제일 기뻐하셨다. 그때가 1954년 12월 말이었다.
---------------------------------------------------------------------------------------------------------------------------
1959년 오레곤주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한 김영운 선교사는 61년 믿음의 자녀들과 같이 캘리포니아로 옮겨 통일교회를 정식 등록하고 많은 식구들을 길러냈다. 그중의 대표적 인물이 62년 전도된 청년식구 피터 콕 Peter Koch이다. 그는 1963년 자신의 본국인 독일로 돌아가 유럽개척의 선구자가 되었다. 피터 콕은 프랑스 , 영국, 오스트리아 , 벨지움으로 식구들을 파송하여 유럽 교회의 기초를 놓았다.
1965년 참부모님께서 세계순회중 미국으로 오셨다. 식구들은 말로만 듣던 ’새말씀‘의 주인공인신 아버님을 흥분과 설레임으로 맞이했다. 아버님께서는 김영운 선교사의 보고를 받으시고, 이제는 서부의 본부를 수도 워싱톤으로 옮겨야 할 때라고 말씀하셨다. 말씀에 따라 미국 본부를 워싱턴 D.C.로 이전했고, 선교 사역은 계속되었다.
김영운 선생의 선교사역의 꽃은 1969년에 미국에서 처음으로 진행된 13쌍 축복행사였다. 외국에서 진행된 참부모님의 첫 축복행사다. 아래는 그 감격스러웠던 역사적 축복 행사 현장에 있었던 식구들의 회고담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
[ 워싱턴 본부는 1969년 2월 28일 금요일, 한국 외 지역에서 처음으로 본부 건물에서 혼인 축복식이 거행되었음을 기쁜 마음으로 알립니다. 참부모님께서 워싱턴에 머무신 지 20일째 되는 날, 여섯 쌍의 기혼 부부와 일곱 쌍의 미혼 부부가 참부모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는 미국에서 거행된 혼인 축복식 중 최초의 가장 큰 축복식이었습니다.
오후 5시, 찬송으로 혼인 축복식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유효원 회장님께서 축복의 의미와 뜻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참부모님께서 입장하시자 뉴욕 식구 메리 펜 자매님이 독창 축가를 불렀고, 이어서 미국 동부와 서부의 식구들이 함께 “맑은 날에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다”찬송을 불렀습니다. 자매님(김영운 선생)이 기도를 올린 후, 긴 흰색 예복과 흰색 장갑을 착용한 축복 받을 대상자들이 정성으로 장식한 복도를 따라 한 쌍씩 입장했습니다.
매 커플은 부모님께 개별적으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신부는 아버님께, 신랑은 어머니께 축복을 받았습니다. 축복을 받은 후, 두 사람은 하나님께 서약을 하고 그리고 반지를 교환했습니다. 일본 식구을 대표하여 오사미 쿠보키 씨가, 영국 가족을 대표하여 닐 윈터바텀 씨가 축사를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기도로 예식을 마무리하시고 신랑 신부를 위해 "만세"를 세 번 외치도록 하셨습니다.
합동 사진 촬영 후, 신혼부부와 가족, 하객들은 가족 식당에 모여 피로연을 즐겼습니다. 피로연 후에는 신혼부부와 부모님께서 함께하는 가족적인 분위기의 노래와 웃음이 가득한 저녁 시간을 보냈습니다.
축복을 받은 부부들은 워싱턴 센터에 3일 동안 머물다가 각자의 선교지로 돌아갔습니다. 축복을 받은 가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버논 피어슨과 맥신 애덤슨, 조지 노턴과 실비아 로그달, 조지 펀슬러와 다이앤 기핀, 에드윈 앙과 마리 레크론, 필립 벌리와 비비안 배런, 칼 랩킨스와 린나 밀러, 켄 포프와 오라 스쿤, 존 슈미들레와 마리 라우, 갈렌과 패티 펌프리, 존과 샌디 슈하트, 웨슬리와 글래디스 사무엘, 밥과 비비안 오스왈드, 그리고 프레드와 자크 스톡.
----------------------------------
축복 소감 및 후기 - 샌디 싱글턴(로웬)
' 선생님'은 식구들과의 첫 공식 모임에서 미국 식구들을 더 알고 싶어 하셨고, 얼마 후에 미국 식구들 중 몇명을 축복해 주고 싶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때 우리 모두는 몹시 놀랐고 심지어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준비되어 있을까? 자격 요건은 무엇일까? 책임은 무엇일까? 그 때 우리들은 미국에서 자격을 갖춘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선생님'께서 미국에서 이렇게 빨리 미국 교회를 튼튼한 기반으로 만들어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생님'께는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모든 식구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격을 갖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워싱턴으로 와서 수련에 참여하라'고 훈령하셨습니다. 워싱턴 센터와 별관은 응답하고 찾아온 식구들로 가득 찼습니다. 많은 식구들이 이 미국에서 거행되는 첫 섭리적 행사에 참여하거나 적어도 지켜보기 위해서 계속 방문해 왔습니다.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축복에 대해 관심이 있는 식구들은 모든 방에서 자정이 넘도록 기도모임을 가졌습니다. 배우자는 어떻게 선택되는가? 어떤 이유로든 축복을 거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친부모를 초대하는 것은 어떤가? 후보자들이 엄청난 긴장 속에서 평소처럼 행동하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거의 히스테리 상태에 가까운 분위기가 감돌곤 했습니다.
참부모님이 계신 2층에서는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때 2층에서는 참부모님을 모신 지도자들이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13쌍- 스물여섯 명의 남녀를 정하기 위해 고심중에 있었습니다. 아래층에서는 대부분 생각하기를 참석자들이 배우자를 찾는 건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혼자 6쌍은 이미 정해져 있지만, 미혼자 7쌍을 어떻게 정한단 말인가 도대체 감을 잡을 수 없었고, 어떻게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 아무도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그렇듯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95%를 잊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커플, 실비아 로그달과 조지 노턴, 그리고 오라 스쿤과 켄 포프가 발표되었을 때, 우리는 이 축복 결혼이 하늘의 뜻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결정이 발표될 때마다 우리의 기쁨과은 점점 커져갔고, 마지막 커플인 리나 밀러와 칼 랩킨스가 발표될 때 센터는 열광과 환호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축복 예식 시간까지 준비시간은 불과 24시간도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열띤 심정으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피아노에서 울려 퍼지는 "로엔그린" 선율은 더욱 신묘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전화를 하며 흥분한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습니다. "엄마,놀라지 마요! 저 내일 결혼해요! 오실 수 있어요?" 한편에서는 목수들이 예식 단상을 만드는 망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닐 살로넨, 트래비스 존스, 지오 매티스는 식장을 장식할- 태양이 뜨는큰 벽화에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예식이 열릴 북쪽 방과 남쪽 방을 화려한 색깔의 국화 장식과 꽃바구니로 꾸몄습니다. 여자들은 새벽 4시까지 26벌의 웨딩드레스를 만들었습니다. 부엌을 책임진 신디 에포는 결혼 피로연을 위해 그녀의 훌륭한 요리 솜씨를 최대한 발휘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노라 마틴은 시내 백화점 점원에게 웨딩드레스에 쓸 태피터 80야드를 사겠다고 말해 점원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녀는 시내에 있는 가게의 흰색 태피터를 싹쓸이해 버렸습니다. 또한 13쌍 커플이 같은 가게에서 결혼 반지를 샀기 때문에, 가게 안은 온갖 호기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베시 오닐은 웨딩 케이크 장식을 고르는 과정에서 마치 자기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듯한 소동을 벌였습니다.
비비언 배런의 어머니는 올해의 명언을 남겼습니다. "내 딸 페이스는 결혼할 때, 일주일 전에 알려줬는데, 비비언은 하루 전에 알려줬지. 이제 딸 하나만 남았는데, 아마 한 시간도 안 돼서 알려줄 거야."
마침내 참부모님 앞에 서서 "만세! 만세! 만세!"라고 외친 열세 쌍의 부부는 진정으로 하나 된 하늘의 축복 가정임을 상징했습니다. 에드윈 앙과 마리 레크론은 동반구와 서반구를 연결하고, 웨슬리와 글래디스 새뮤얼은 흑인과 백인을 하나로 묶는 가정으로, 필립 벌리와 비비안 배런은 북미와 남미를 하나로 통일하고, 칼 랩킨스와 린나 밀러는 미국의 동부와 서부 해안을 연결하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센터의 옆의 한 이웃 집 사람은 갑자기 도착한 많은 꽃들과 큰 노래 소리에 놀라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다. 경찰관이 왔지만, 우리가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그냥 돌아갔습니다.
----------------------------------------------------------------------------------------------
기록를 마치며
김영운 선생은 1975년부터 뉴욕주 배리타운에 있는 통일신학대학원에서 현대신학을 가르치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 주요 저서로는 『통일신학과 기독교사상』, 『신원리와 그 적용』, 『세계종교 1권, 2권, 3권』, 『통일신학』, 『신학개론』, 『근대신학의 유형』 등이 있다. 후에는 선문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다 1989년 성화하셨다.
1. 선생의 생애는 하나님께서 기르시고 소명하신 인물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섭리의 발자취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2. 선생은 참부모님 섭리 초창기 시대에 부름받은 식구들의 감격과 놀라운 체험, 그들의 절대 믿음과 승리자의 모습을 생생한 추억으로 증언하고 있다. 신학자의 안목으로 <원리>를 깊이 이해하였고, 고귀한 하늘의 뜻과 거대한 아버님의 사명과 헌신을 공감하고 공유하며 이 경험을 바탕으로하여 선교일선에서 하늘의 인재들을 같은 심정과 사랑으로 교육하고 길렀다.
3. 선생의 심정과 관심, 가치관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하늘을 뜻을 중심하고 있었다. 지위와 소유에서 완전히 자유한 신앙인으로 타락한 인간의 한계인 자기중심성을 극복한 신앙적 인격의 모범이며 전형이다.
4. 선생의 신앙은 인격과 일치하였다.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존경을 받았다. 선생이 이화여대에 교수가 된 것은, 직업을 구하여 간 것이 아니다. 김활란 총장이 김영운이라는 인물이 있다는 말을 듣고 직접 찾아와 초빙해 간 것이다. 김활란 총장은 선생의 신앙과 학문적 깊이에 공감하여 자기의 뒤를 이을 차기 총장으로 유념하고 있었고, 학생들도 이를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김영운 선교사님,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