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전 김영운 선교사 <1부>

김영운 선교사는 1963년 캘리포니아주 샌크래멘트 센타에서 있은 “미국선교 5주년 기념 강연”에서 ”우리 교회는 반대와 핍박을 이기고 계속 성장 발전하여 이제는 어느 누구도 우리를 막거나 꺾을 수 없게 되었다“고 선포하고 있다. 아래는 김영운 선교사님의 특별 간증 내용의 일부다.
[ 나는 1959년 1월 4일, 폭설이 쏟아지는 가운데 미국 서부 오리건 대학교 유진 캠퍼스에 도착했다. 신학을 공부하는 연구생 신분이었다. 신학을 공부하며 한편으로 '원리‘를 영어로 번역하는 데 몰두했다. 주말에는 삶의 더 깊은 의미를 찾는 다양한 단체와 개인들을 방문하여 '원리'을 가르치고 자기의 경험을 공유했다. 유진은 보수적인 작은 마을이라 책을 출판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1960년 말, 국제적인 도시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했다. 다섯 명의 열정적인 젊은이들이 선생을 따라나섰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식구들의 헌신과 열심으로, 1961 세금 면제와 법적 보호를 받는 사회단체로 우리교회(HSA-UWC)를 정식 등록할 수 있었다. 1962년 7월부터는 주변의 베이 지역 공동체로 선교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그해 말까지 선교영역은 로스앤젤레스와 새크라멘토로 확장되었고, 회원 수는 50명이 넘어섰다.
회원 수가 늘어나면서 버클리, 오클랜드, 새크라멘토, 산호세, 로스앤젤레스, 프레즈노에 새로운 센터를 열었다. 유럽을 비롯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새말씀‘ 완전히 이해한 후,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 그곳에서 사역을 시작하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선교 활동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확장되었고, 1963년 피터 콕 선교사를 오스트리아로 파송했다.]
선교사님은 이미 60년 전에 이런 승리의 보고를 하늘 앞에 올린 놀라운 승리의 신앙인이다. 오늘의 우리를 일캐우고 크게 각성시키고 있다.
은하계에서도 특별히 빛나는 별이 있다. 하늘의 빛나는 별 같은 인물이 김영운 선교사님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생을 헌신하며 수많은 식구들을 교육하고 지도하며, 언제나 단아하고 고고한 자태를 간직하시고 확신과 열정에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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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운 선생은 영적, 지적 감수성이 남다른 분이었다. 14살 어린 나이에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나님’을 부르며 울며 기도하다 잠들곤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밤을 새워 기도하며 성경을 읽었다. 일본과 미국에 유학하여 뛰어난 신학적 통찰력을 가지게 되었다. 새말씀 ‘원리’를 처음 듣는 순간에 그 위대함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대부분의 신앙인이 갖고 있는 신앙의 맹목성과 성서이해의 애매함을 너머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새말씀’의 석연한 설명은 너무 통쾌했다. 특히 창조목적의 설명은 너무 확실했고 아름다웠다. 사탄의 정체를 알고 무릅를 쳤다.
특별히 예수 십자가의 한에 대한 이해는 선생을 완전히 새로운 신앙인으로 부활시켰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길로 아니었고, 하나님의 뜻도 아니었다는 설명은 충격 그 자체였다. 예수님은 살아서 하나님의 뜻, 지상천국을 이루려 오셨다. 그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를 믿고 따랐다면 지상 천국은 2처년 전에 이미 이루어졌고, 재림은 필요 없는 섭리라는 설명은 가히 혁명적었다
기독론의 난해함을 석연하게 설명하고, 절대 타자가 아닌 사랑의 하나님, 정이 있고 사랑을 느끼기를 바라시고 행복한 자녀들을 보시기를 원하시는 하늘부모님, 모두 놀라운 ‘새진리’ 말씀이였다. 아버님의 관심과 기도와 삶의 목표가 일반 기독교 지도자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한없이 높고 넓다는 것에 감복하고 감사했다.
선생을 완전히 굴복시킨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시며 통곡하시는 아버님의 눈물어린 기도였다. 그토록 열망했던 천국을 이루지 못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붙들고 눈물로 통곡하시며 기도하는 아버님 앞에 완전히 엎으려 지고 말았다. 자식을 잃은 슬픔의 하나님, 한의 하나님을 붙들고 몸부림치시는 아버님과 같이 울었다. 그 스승을 따라 핍박과 고난을 이기는 식구들 하나하나가 모두 감동과 은혜의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뜻, 창조이상을 이루기 위해 열심인 식구들 속에서 함께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여기가 나의 천국이다’는 고백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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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 김영운 선교사 >
( 1915-1989)
- 시대적 배경 -
20세기는 인류 역사 최대의 격동기였다. 두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류가 수천만명의 희생을 당하고, 가공할 살생 무기 원자폭탄이 실제로 터져 한꺼번에 50만명이 죽는 일도 벌어졌다.
하나님의 섭리 역사도 이 격동기에 대 전환을 맞게 된다. 타락의 인류 역사를 종결짓고 구원섭리를 완성하려는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 섭리 완성의 주인공 재림 주님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선한 하나님의 시대가 마침내 열리려 하는 때, 오랜 동안 인류와 역사를 농락해온 사탄의 악의 반대역사도 대단했고, 하나님 편의 성령의 역사도 뜨거웠다. “성령을 물 붓듯 부어주리라”한 성경 말씀대로, 새로운 변화와 부활의 역사도 뜨거웠다. 선과 악이 격렬히 부딪치며 교차하는 대 역전의 시대였다.
그 절정의 역사가 1950년대에 일어났다. 그것이 ‘이대사건’이다.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이화여자대학의 교수들과 학생들이 ‘이단 통일교’에 다닌다는 이유로 집단 퇴학 처분을 받은 것이다.
- 소위 말하는 ‘이대사건’의 전말 -
1954년 학기 초부터 이대 학생 수백명이 학교 당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통일교의 새말씀 ‘원리’에 빠져 학업을 소흘히 하고, 밤에도 기숙 담을 넘어 교회로 간다는 소문이 났다. 동시에 ‘통일교에 가면 방바닦에 전기 장판이 있어, 한번 앉으면 일어나지 못하고 ’원리‘를 들어야 한다’, 심지어는 ‘혼음을 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한국의 모든 일간지들이 특종 보도인 양 기사화하고, 방송이 연일 떠들어 내는 바람에 전국이 시끄러웠다.
미국 감리교단의 경제 지원을 받는 이화여대는 비상이 걸렸다. 김활란 총장은 가장 신임하는 두분의 교수, 학생처장 최원복 선생과, 신학과 교수 두분을 보내에 직접 가 보고 확인한 내용을 보고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결과는 뜻밖이었다. “그 ‘새말씀’을 들어 보니, 정말 옳은 말씀이고 대단히 성서적이라, 나쁜 것이 없으니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도 문제가 없다. 총장님도 한 번 들어보시는 것이 좋겠다”는 보고를 하는 것이었다.
총장은 다시 500명의 학생들의 기숙사 사감 선생인 한충화 교수를 불러 학생들을 단속하라 했으나, 한충화 교수도 벌써 새말씀 ‘원리’에 감동되어 학생들과 한편이 되어 있었다.
사태 수습이 어렵게 되자 결국 이기붕 부통령의 부인인 부총장 박마리아의 의견을 받아들여, 특단 조치를 취하게 된다. 새말씀 ‘원리’에 심취한 학생들과 교수들에게 ‘학교’냐 ‘통일교’냐 양자 택일할 것을 강요했다. 아래는 김영운 선생 자신의 간증이다
[ 이화여자대학교의 두 여교수가 ‘새원리’를 공부했는데, 그중 한 분이 나에게 새원리를 소개해 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많은 학생들을 새원리로에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고정관념이 없었던 학생들은 새로운 가르침에 매우 개방적이었다. 대부분 기숙사에 살고 있던 학생들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학교 당국은 이것이 건강하지 못한 광신적인 운동이 아닌지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통제가 불가능하기 전에 사태를 수습하여야겠다고 생각하고 교수진과 학생들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인 김헬렌(김활란 총장) 씨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꼭 이 운동에 뛰어들어야 합니까? 다른 운동들처럼 객관적으로 연구만 할 수는 없습니까?" 나의 대답은 "저에게 종교는 생계 수단이 아니라 삶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관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였다.
일주일 후, 그녀는 나를 사무실로 불러 수업이나 교내에서 ‘새원리’에 대한 언급을 삼가 달라고 부탁했다. 내 신앙을 드러내지 않으면 모든 것이 괜찮을 거라고 했다. 이에 저는 "김 총장님, 저는 온 세상을 제 교구로 삼아 가르칠 수 있으니 이 캠퍼스를 떠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라고 답했다. (사실 그때까지 나는 대학 내 어느 누구와도 ‘원리’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고, 학교의 어떤 법규나 규정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약 일주일 후, 그녀는 내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세요. 통일교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든지, 아니면 여기서의 교직을 그만두든지." 이와 비슷한 내용의 편지가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에게도 발송되었는데, 졸업을 한 학기 앞둔 학생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새로운 진리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학생들의 부모들도 대학 측에 항의하여 나섰다. 언론 또한 학생들에게 동정심을 표하며 대학 측의 종교 자유 탄압을 비판했다. 연세대학교에서도 같은 탄압 정책이 한 명의 교수와 두 명의 학생에게 적용되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는 몇몇 학생들이 학교 당국에 순응했지만, 13명의 학생과 5명의 교수는 새로운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두 대학은 결국 제적이라는 극단 조치를 취했다.
학생들은 학업을 포기해야 하는 아쉬움은 있었겠지만, 슬픔이나 좌절감에 빠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시대에 맞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약속하는 신성한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선교 활동에 모든 시간을 쏟아야 했기에, 대학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신 것은 하느님의 은혜라고 생각했다. 나는 나를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추방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적개심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이화대학교의 결정은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생의 길을 막는 중대한 실수였다].
‘이대사건’으로 불이 붙은 통일교 ‘스캔들’에 휴발류를 뿌리는 일이 일어났다. 아버님께서 ‘이단교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언론도 덩달아 사건을 연일 특종으로 1면에 도배하며 난리를 떨었다. 아버님은 7월4일 입감되어 10월14일 무죄 석방 되셨으니, 100일의 십자가 고난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시끄럽던 신문 방송은 조용했다. 어느 방송, 신문에도 ‘무죄석방’보도는 없었고, 동아일보 만이 아버님께서 무죄석방 되셨음을 사회면 다섯줄 토막기사로 보도했다.
‘이대사건’의 진실은 악의 역사와 싸우는 새시대 진리의 용사들이 역경을 이기고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김영운 선생은 선교사의 선구로 세계선교의 등대가 되었고, 퇴학당한 이대생들은 동터오는 새섭리 시대의 여명의 눈동자들이 되어 눈먼 세상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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